내다 버릴 곳도 마땅찮아 책을 태워 구들 덥힌다/홑 창호를 뚫고 밤새도록 혹한 파고든 고향집/책장이나 찢어 군불 지피려/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불길이 옮겨붙는지 활자의 파란 넋들이/일어났다 주저앉는다 스러지고 스러지는/저 아궁(我窮) 속의 어떤 학습은/캄캄한 미로를 헤맸으나 굴뚝 없는 구들이었으니/매운 연기로 가득 찼으리라 생각이 드는 오늘 아침/불길이 넘기는 영문 원서는/책보다 먼저 타오른 큰형님 유품이리라/곁불에 찌드는 도형은 육지의 항해술로 파선한/작은형의 좌표고 크레파스 그림일기는/부도를 내고 피신한 아우네 조카들 일과겠지만/(......)
김명인의 '책을 태우며' 중에서
■ 최근 이토록 우렁찬 모국어 명창(名唱)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책을 태우며 구들을 덥히는 풍경은 풍자와 현실이 팔랑거리며 서로 붙은 접면(接面)이다. 불길이 화득거리며 넘기는 책장들을 보며, 괴로웠던 가족사를 스냅으로 찍어내는 솜씨는 아픔조차도 달콤해지는 도착(倒錯)을 맛보게 한다. 죽어서도 성균관이나 향교의 유생이고 싶었던 학생부군신위의 질긴 꿈이 떠오른다. 책이 내 삶의 구들장을 데우기나 했던가. 문자들이 생각을 진전시키고 마음을 바로세웠던가. 1천년 책으로 세운 거대한 문명이 일거에 잿더미로 주저앉는 지금에, 여전히 문자를 빌어먹으며 살고있는 나를 각성시키는 화두. 분서(焚書)! 평생 책에 쫓기고 책에 눌리면서도 마침내 책에 순치되어 책귀신 아래 자기를 주저앉혀 어쭙잖은 경배를 일삼는 나여. 책과 자기를 분간 못하고, 빌어먹은 지식을 스스로의 영성(靈性)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범 글쟁이'여. 너를 태우는 시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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