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하림이! K여고 문혜경이 알아? 같은 문예반이람서?”
하며 손가락 끝으로 가슴패기를 툭툭 치며 웃던 그의 학창시절 얼굴이 떠올랐다.
후배들에게 공포와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래도 한가닥 인간적 그늘이 느껴지던 얼굴이었다. 그늘 진 얼굴의 짙은 눈썹 아래 눈은 무언지 모를 불길 같은 것으로 타고 있었다. 하림이 같은 범생이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길 같은 것.... 어쩌면 그 역시 외롭고 반항적인 청년기의 뒤안길을 걸어가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런 그가 죽었다. 그것도 자살이라니....
하림은 무척 혼란된 마음으로 며칠을 지내다가 동창회 날에 맞추어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무엇보다 혜경이의 사는 모습이 궁금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리는 곳은 이젠 폐교가 된 옛날 운동장이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새가 바람에 풀풀 떨어졌다. 떨어진 은행잎은 나무마다 발치에 노란 색종이를 뿌려놓은 것처럼 깔려 있었다. 관리를 하지 않아 잡풀이 무성해진 화단에 유난히 붉은 화살나무가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하늘만큼 넓어보였던 운동장이 손바닥만 했다. 그 손바닥만한 운동장 한쪽 가에 십여대의 승용차, 트럭, 봉고가 가지런히 서있었다. 교무실이 있던 곳에서 먼저 온 친구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난히 큰 웃음소리는 준호 마누라 오영숙의 웃음소리일 것이었다. 초등학교 동창 커플은 몇 쌍 되었지만 동기 커플은 그들이 유일했다.
‘혜경이도 왔을까?’
하림은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교사부터 한바퀴 빙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낮은 단층짜리 교사 앞에 이순신 장군 상과 세종대왕 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어깨죽지에 허연 새똥이 앉은 석고 상 여기저기에 검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반공소년 이승복 상 역시 여전히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서있었다.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하던 국민헌장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개인의 행복이나 자유보다 우선하는 국가. 나아가 개인의 행복이나 자유마저 유보시키고 박탈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국가. 비애국자의 낙인이 찍히는 순간, 파렴치범이나 강간범 보다 더 엄혹한 벌과 도덕적 비판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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