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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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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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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답지 않게 푸근한 날이었다.
겨울날의 오후 세시 반은 사십대 후반의 여자처럼 뭘 하기에도, 뭘 하지 않기에도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아직 해는 남아 있었지만 그늘 또한 어딘가에 숨어서 곧 무대 위로 등장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림은 길가 옷 가게 안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세시 반.
동철과의 약속 시간이 아직 삼십분이나 남아 있었다.
‘무얼 하나....?’
며칠 전 한바탕 눈이 내리고 난 끝이라 그런지 길게 이어진 담장 기와 응달 진 곳에 아직 얼어붙은 눈의 흔적이 먼지에 더럽혀진 채 남아 있었다.
‘이왕 일찍 온 김에 시장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
하림은 한쪽 어깨에 맨 가방을 추스르고, 난전들이 펼쳐진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다. 하긴 동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거기엔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헌옷, 헌 구두, 헌 책, 가짜 화장품, 가짜 비아그라 같은 정력제, 낡은 사진기, 오래된 전축, 국적 불명의 조각품, 헌 액자, 거기에다 고물 자전거, 고물 명품 오토바이까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각종 골동품이 널려 있었다. 그 사이로 흘러간 뽕짝 가락이 제 흥에 겨워 함부로 발길에 채이며 돌아다녔다. 가락은 그 가락이 있을 곳에 있어야 신이 나는 법이다. 로데오 거리의 젊은 스타들이 있다면 여기엔 여기대로의 아줌마 트로트 스타들이 있었다. 남의 인생 함부로 발로 찰 일은 아니다.
산더미 같이 쌓인 고물들 속에서 그래도 가끔은 시궁창에서 진주가 발견되듯, 보물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중에는, 눈만 밝고 꼼꼼히 고를 수 있는 인내력만 있다면 어디 메에선가 추사 글씨나 단원 그림책, 혹은 중국 청나라 시절 황제가 사용하다 버린 요강 같은 값나가는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는 할 일없는 생각을 얼핏 떠올릴 사람도 혹 있겠지만 처음 이곳에 온 초짜배기 빼고는 그런 터무니없는 환상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지껏 그런 보물을 발견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런 보물을 가만히 두고 있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하림의 머리 속에 문득 혜경에게 할 선물을 하나 골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떡 본 김에 제사라고 왜 그 생각을 진작 못했을까.
주제에 선물이라니?
자기가 생각해도 풋, 하고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런 참에 혜경을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사면 꿩 먹고 알 먹고 인 셈 아닌가. 달리 그녀를 위해 뭘 산다는 생각을 아직껏 한번도 해보지 못한 자기로서는 여간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마음이 달뜨고 바빠졌다. 혜경이 웃는 모습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물이라고 해본 게 언젠가 싶었다. 아니, 처음이 아니던가. 감격해할 그녀를 생각하자 저절로 신이 났다.
그나저나 뭘 사지?
그제사 마음이 바빠진 하림은 여기저기 길거리를 따라 늘어선 좌판을 눈으로 훑으며 걸어갔다. 싸면서도 혜경의 마음에 꼭 들만한 물건.....그런 게 금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늙은 영감들에게나 어울리는 오래된 물건이거나 중국제 싸구려들뿐이었다. 그렇다고 고물 전축이나 지금은 쓰지도 않는 씨디나 옛날 재봉틀, 청동 조각상 같은 것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다 주머니가 얄팍해서 난전을 버리고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골동품 악세서리점 같은 덴 들어가 볼만한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겨우 고른다고 고른 것이 오천원짜리 노란 털장갑 한 켤레였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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