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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공포와 현실의 간극, 소용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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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임산부를 살해한 뒤 자궁에서 태아를 꺼내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전북 익산에서 20대 남성이 어머니를 성폭행 한 뒤 살해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연간 1300만건의 낙태수술이 이뤄지는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요새 저녁 뉴스를 보다보면 '살다보니 참 별일을 다 보겠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끔찍한 공포 영화나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잔인한 사건도 요즘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을 만화속에서 만나고 싶다면? 이토준지의 '소용돌이'가 제격이다. 주인공의 삶이 현실에서의 내 삶과 너무나 비슷해 애착이 가는 작품도 있지만 반대로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맘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소용돌이'는 당연 후자다.

국내에서도 꽤나 인기 있었던 이 작품은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2000년·히구친스키 감독)로도 제작됐다. 국내 개봉 당시 신은경의 출현으로 관심을 모았으나 흥행하지는 못했다.

작품을 얘기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게 바로 작가 '이토준지'다. 미즈키 시게루, 우메즈 가즈오, 히노 히데시에 이어 일본 호러만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토는 1987년 '토미에(3권·시공사)'가 제 1회 우메즈 카즈오상 가작에 당선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독특하고 짧은 에피소드로 엮인 '이토준지 공포만화 콜렉션(16권·시공사)' 등으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지나치게 잔인하고 섬뜩한 그림체 때문에 그의 작품 뒷 표지에는 '노약자나 임산부는 구독을 금합니다'라는 문구가 항상 써 있다.
이토의 만화에는 자극과 불쾌감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중학교 시절 이토준지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고백하면, 다들 나를 이상하게 볼까. 그러나 그간 볼 수 없었던 디테일한 묘사, 기괴한 내러티브는 썩 괜찮았다. 매일 학교와 집을 오가고 간간히 친구들과 만나는 단순한 일상에서 이 충격적인 그림책은 큰 자극이었다.

이토의 독특한 만화세계 덕분에 그에 대한 소문도 끊이지 않는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느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 위해 자살해버렸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그것인데 모두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들은 잔인함에만 의지하지 않는 공포라는 것에서 그 차별성이나 우월성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소용돌이'가 그렇다. 뜬금없는 전설이나 한(恨) 같은 흔한 소재가 아니다. 이토는 우리 삶에 흔히 찾을수 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던 그 무늬를 공포의 소재로 삼았다. 암모나이트 화석, 기계 태엽이나 모기향, 심지어는 귓속 달팽이관과 손가락 끝의 지문까지. 보고 있으면 중심을 향해 시선이 이동하고 찾으려고만 하면 하루에도 수십, 수백개를 찾을 수 있는 이 단순한 무늬에 대한 저주가 쿠로우즈란 마을에 내려앉으며 얘기는 시작된다.

영화 소용돌이의 한 장면. 이 남자는 소용돌이의 매력에 빠져 결국 자기 자신이 소용돌이가 돼 죽는다.

영화 소용돌이의 한 장면. 이 남자는 소용돌이의 매력에 빠져 결국 자기 자신이 소용돌이가 돼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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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어느날인가부터 소용돌이 무늬가 많아지고 주인공들이 이를 신경질적으로 의식하면서 쿠로우즈는 '소용돌이 지옥'이 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끔찍한 사건들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모두 '소용돌이'에 얽힌 사건이다.

소용돌이 마니아가 된 나머지 몸을 뒤틀어 스스로 소용돌이가 된 남자도, 집단 이지메에 시달리다가 달팽이가 돼 버린 굼뜬 남학생도 이 마을에선 실제 인물이다. 지나친 과시욕으로 머리를 소용돌이 모양으로 한없이 부풀리다 기운을 빼앗긴 여학생이 '말라비틀어' 죽는 다거나, 원수집안의 자식인 탓에 사랑을 방해받는 젊은 남녀가 서로의 몸을 꽈서 떨어질수 없는 형태가 된다는 등의 얘기는 나름 앞뒤가 맞는다. 위선과 과시욕, 독점욕, 이기심 등 인간의 뒤틀린 심사와 그에 걸맞는 소용돌이가 만나면 말 그대로 '저주'가 되는 셈이다.

비현실적인 결과물을 제외한다면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건들은 현실에서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지매, 집안갈등, 돈 때문에 서로를 등진 가족...

괴물이나 귀신같은 공포의 대상이 존재하는 영화나 만화에는(후속편 제작을 위해 의도적으로 여운을 남겨두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들이 깔끔하게 처리되는 결말이 있다.

한국 공포영화의 단골인 처녀귀신이 한을 푼 뒤 이승을 떠나고 악마나 악령도 선의의 무리에 의해 퇴치되는게 영화와 만화속 마지막 장면이다. 소용돌이의 경우 주인공들의 죽음을 통해 저주가 끝난다.

소용돌이는 바로 이 공포와 현실의 간극을 유지하면서 기분좋게(?) 얘기를 이어간다. 오히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괴한 사건들만 묶어 놓았기 때문에 일련의 섬뜩함이나 불쾌감도,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셈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최근의 뉴스야말로 공포와 현실을 꼼꼼히 채워 버리는 최악의 공포물이다. 매일 저녁 방영되는 뉴스에는 '악마'의 최후를 확인할 수 없다. 도입부에서 밝힌 뉴스 속 이야기가 '소용돌이' 보다 더 잔인하고 가혹하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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