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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인간과 괴물의 교차점.. 기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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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어느 명절날이었다. 문화라고는 TV드라마나 가끔씩 학교에서 단체로 갔던 어린이 뮤지컬 빼고는 접해보지도 못했던 그 시절, 나는 삼촌 방 침대 밑에서 신세계를 만났다. 그 곳은 세련된 유머와 슬랩스틱 코메디, 이성 유혹하기에 대한 기술부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상의 철학적인 사고를 요구했다.

나는 꼬박 1박 2일 삼촌방에 숨어 그 세계에만 빠져있었다. 그리고 훗날 그것이 무술, 연애, 혹은 판타지의 교과서로 불리우는 '드래곤볼' '북두의 권' '오렌지보이' '비디오걸 아이' 그리고 '시티헌터'였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는 내가 그 당시 나이로는 읽어서는 안될 것이었지만, 나름 부작용 없는 문화체험이었다고 흐뭇하게 평가하곤 한다.
사실 만화책은 아직 제대로된 '문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만화책을 사오면 '니가 애냐'는 핀잔을 들어야 하고 지하철에서 '이나중 탁구부'를 당당히 펼쳐 보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고급'과 '대중'으로 분류되는 문화 카테고리에서 만화책은 늘 대중문화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가벼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만화책의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다. 만화책은 정장차림이나 바른자세, 읽고 외우거나 이해해야한다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코너명에서도 언급했듯 가장 편한 장소에서 가장 편한 복장과 자세(나는 엎드려 읽는 자세를 선호한다)로, 먹기 편한 음식(귤을 선호한다)까지 옆에 늘어놓고 만끽할 수 있다.

만화책은 동시에 리얼리티를 위한 엄청난 제작비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최적의 '대중문화'이기도 하다. 소설보다 쉽고 영화보다 가깝고, 심지어 우리가 화장실에서 깊은 시름에 빠질 때에도 우리 곁을 지켜주니 기특하기까지 하다. 복잡한 해석을 해도 괜찮지만, 그런 의지가 없어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만만한 겉모습이 우리를 긴장하지 않게 하고, 그렇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흡수하는 문화는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뿌리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자가 처음 소개할 만화책은 '정통'과 '만만함' 사이에서 천재적으로 줄다리기를 하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출세작 '기생수(학산문화사·10권 완결)'이다.

기생수는 '누군가'의 독백으로 첫 장을 연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간의 백분의 일이 줄어든다면 쏟아내는 독도 백분의 일이 될까'

만만치 않는 첫 마디에 독자는 약간 주춤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몇장 넘기면 실로 만만한 그림체에 마음이 좀 놓인다. 레이아웃은 답답하고 주인공 남녀는 그저그런 비주얼에 그친다. 그 '그저그런 얼굴'의 주인공 신이치는 심지어 외모 뿐 아니라 공부나 싸움, 어느 하나 두드러지지 않는 평범한 남고생이다.

그러나 인간의 뇌를 차지해 동족인 인간만을 잡아먹는 '기생수'들이 지구상에 갑자기 출현하면서 캐릭터의 만만함을 잊게하는 '내러티브'의 힘이 발휘된다. 신이치의 저지로 오른손에 머물게 된 이 기생수 '오른쪽이'(신이치가 1초만에 지어낸 이름이다)와 인간인 신이치는 묘한 공생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신이치는 어머니를 잃고, 주변 친구들을 잃고, 인간의 뇌를 차지한 기생수들의 공격을 버텨내면서 기생수의 모습과 가까워진다. 동시에 오른쪽이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성애' '인류애'등을 경험하며 인간의 모습을 이해한다.

ⓒHitoshi Iwaaki / Kodansha Ltd.

ⓒHitoshi Iwaaki / Kodansha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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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인간과 괴물의 교차점은 기생수의 기묘한 캐릭터 '타미야 요코'를 통해 극에 달한다.

타미야 오코는 '여자인간'의 뇌를 장악한 괴물이지만 선구자적이고 철학적인 유형의 기생수다. 왜 자신들이 지구에 와야 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했지만 후반부에 인간의 총에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다른 기생수와의 의도적인 성관계를 통해 임신을 한 타미야 요코가 결국 '인간', 즉 먹잇감에 불과한 아이에게 모성애를 느낀다는 것이다.

만화 속 인간들에게 '괴물'로 불리던 타미야 요코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그가 총탄을 막아내면서 아기를 지키고 신이치에게 넘겨주기위해 걸어가는 모습은, 이 만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다. 담담하게 걸어가는 타미야 오코가 네모칸 안에 그려질 따름이지만, 기자는 이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추하게 운다.

또한 작가는 인간의 인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괴물과 인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이 모습은 햄버거를 한입 베어물고 맛이 없다며 쉽게 쓰레기통에 버리는 흔한 풍경이나 어린 남학생들이 고양이를 향해 돌을 던지는 무서운 천진난만함 등이다.

인간인 '히로카와 다케시' 역시 눈여겨 볼 인물이다. 그는 인간이면서도 기생수들의 인간사냥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마지막 그가 군의 총격으로 사살당하면서 외치는 한마디는 마치 반성문을 낭독하는 듯 하다. 감정적이기보다는 설득력이 있다. 인류애로 통칭되는 애매모호한 감정이라기보다, 일목요연하게 '내가 오늘 잘못한 일'에 대해 꼬집히는 느낌이다.

'환경보호도, 동물보호도 모두 인간의 편의만을 생각한 삐뚤어진 사고방식인 것을 왜 인정하지 않나? 인간 한 종의 번영보다 생물 전체를 생각해! 그래야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에 기생해 생물 전체의 균형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우리에 비하면, 인간이야말로 지구를 좀먹는 기생충, 기생수다!'

그렇다면, 결국 이야기는 환경보호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다소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기생'이라는 표현 대신 '서로 기대고 있다'는 마무리로 모두를 달랜다. 결국 시급한 것은 지구에 기생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성보다 지구상의 모든 종(種)들이 서로 기대고 있다는 데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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