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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화장실의 ‘임전무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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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국도변 사고다발지역에는, 멀리서 보면 진짜경찰로 보이도록 합판으로 만든 모형경찰들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야간에는 번쩍거리는 붉은 경광등을 들고 있었죠. 과속으로 인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언제부턴가 그 모형들이 거의 도로변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일까요?

다른데서 음주측정 받고 딱지를 뗀 이들이 지나다가 차에서 내려 분풀이로 모형경찰을 마구 두들겨 팼다고 합니다. 특히 과속으로 달려오다 뒤늦게 그걸 발견하고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게 된 음주운전자들이 더 문제였습니다. 모형에 속은 게 분한 나머지 일단 차를 세운 후, 목격자가 없으니 팔을 부러뜨리는가 하면 몸통을 이단옆차기로 차고, 목을 꺾어서 논바닥에 처박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지역경찰들이 부러지고 내동댕이친 걸 수습하여 붙인 다음 다시 세워놓기를 반복했으나, 예산만 낭비할 뿐 또 얻어맞긴 마찬가지라 포기했다고 합니다. 방패도 안 든 모형경찰에게 실컷 무력을 행사하고 차에 오르는 사람의 어깨가 제법 의기양양하죠. 짐작하건대 함정단속을 당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평소의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해소한 이가 더 많을 겁니다. 어찌 모형뿐이겠습니까. 대한민국 경찰이 더 이상 그런 존재로 전락되어선 곤란합니다.

남들이 다 쉬는 연휴에 쉬지 못하고, 알아주는 국민들보다 비난하는 시민들이 더 많은 게 요즘 경찰입니다. 250여년 전에 연암 박지원이 ‘쓸데없는 관직’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한 직종이 바로 토포사(討捕使)였습니다. 그 토포사는 오늘날로 치면 검찰, 경찰 등 사정기관 사람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지팡이’가 하루아침에 ‘민중의 몽둥이’로 인식될 수도 있는 참으로 고단한 직업입니다.

경찰이 연휴기간에 군포 여대생실종사건을 해결함으로써 그나마 실추된 이미지를 일부 회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사본부가 CCTV 300대를 분석하고, 범행시간대에 통과한 용의차량 1200대를 일일이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은 경찰의 명예회복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하고 힘든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근데 경찰이 흉악범들의 얼굴을 그토록 과잉보호 해주는 이유를 국민들은 잘 납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 필요가 있지요.
일 잘하고도 시위진압문제로 더 큰 욕을 먹는 경찰의 처지가 한편 안쓰럽기도 합니다. 공권력이 경찰을 통해서 직접 피부로 와 닿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경찰이 잘못하면 대통령이 욕을 먹는 경우가 많은 이상한 전통이 있습니다. 경찰의 무리수로 대통령이 사과한 경우는 부지기수이고 4·19혁명처럼 정권의 몰락을 재촉한 불행한 역사도 있습니다.

과격한 경찰력을 행사한 배경에는 더 과격한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력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임전무퇴’란 글을 자기 집 화장실 문에 써두고 실천하는 사람을 TV에서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 들어설 때마다 그 글을 보며, 배설을 완료하지 못하면 결코 문을 열고 나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큰 볼일을 보러 들어가는 분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참 재미있는 발상 아닌가요. 똑 같은 ‘임전무퇴’가 시위장소와 화장실이란 용도에 따라 이렇듯 쓰임이 다릅니다.

서울 강서구에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가로간판이 걸린 가게를 보았습니다. 저 가게가 뭘 파는 곳인가 하고 들여다보는 순간 저절로 미소가 번졌습니다. 마네킹들에 갖가지 색상의 팬티를 입힌 걸로 보아 속옷을 파는 가게임이 틀림없었습니다. 대체 주인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비록 자신이 파는 속옷은 부드럽지만(외유) 고객들의 물건만은 강하게 보강(내강)해 주겠다는데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어차피 사 입는 속옷. 분명히 그 동네 아줌마들의 발길이 잦을 수밖에 없겠죠.

우리나라 자영업자들 비율은 무려 32%로 선진국에 비해 두 배나 됩니다. 외환위기 이후 퇴출된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고 들어온 시장이 10년이 지나 포화상태가 된 겁니다. 그들이 최근 들어 겪는 극심한 매출감소로 인해 행복지수가 거의 무직자 수준에 가깝다는 통계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권리금은커녕 가게를 내놓아도 팔리지 않아서 마지못해 운영하는 가게가 태반이 넘습니다. 그 와중에 속옷가게가 나름대로 불황을 이기기 위해 짜내는 ‘외유내강’ 아이디어가 참 기발하고 심각(?)하지 않은가요.

상습적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에겐, ‘여기 쓰레기를 버리다가 걸리면 고발한다’는 엄포를 놓아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CCTV가 설치되었다고 겁을 줘도 주위를 확인하곤 투기는 계속됩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면 당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입니다’라고 써 두니 확실히 쓰레기 버리는 주민들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이성에 호소하는 대신 양심에 호소한 것이 먹혀들어간 셈이죠.

공중화장실 남성용 소변기 위에 붙여진 ‘한 발짝만 앞으로!’라는 고압적인 말투는 군대에서 통하던 ‘일보 전진!’을 우리말로 풀어 쓴 데 불과합니다. 물건(?)을 들고 어정쩡한 자세로 1보 앞으로 다가서게 하는 명령어보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할 건 눈물 말고도 있습니다”란 글로 새삼 정조준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것도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여 효과를 본 시대의 명문입니다.

서서히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서울의 봄은 ‘시위의 계절’로 시작되겠지요. 과격한 시위에 방패로 밀어붙이고 물대포를 쏘는 고전적인 작전은 이제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쇠막대기와 화염병으로 중무장한 시위대에게 정공법으로 맞서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뻔한 이 공식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먼저 시위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진압문화도 함께 진화해야 합니다. ‘무석무탄(無石無彈)’ 네 글자로 최루탄을 추방했던 경찰도 서울경찰청이지 않습니까?


지난 주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만 대한민국시위문화-이거 고치지 않고는 국가브랜드에 미래가 없습니다. 햇볕정책이 북한보다 남한의 길거리에서 먼저 실행될 때라고 봅니다.

이번 용산 사건을 계기로 시위대도 경찰도 국가브랜드 차원에서 보다 유연한 마인드를 갖고 ‘외유내강’하는 시대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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