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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천자]마음 저 들판, 길을 내고 걷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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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천자]마음 저 들판, 길을 내고 걷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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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건강할 때 우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가족, 친구, 직장, 사회활동,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까지. 그러다 갑작스런 질병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제야 가졌던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는 '기능성 이상운동증후군'이라는 병을 극복하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매일 반복해서 걷기 시작했다. 비록 아파트 단지와 근처 한강변이라는 한정된 공간이었지만 거대한 나무가 들어선 메타세쿼이아 길, 몸의 치유와 시를 통한 마음의 치유를 도와준 피천득 길, 단풍나무가 가을 햇빛을 받아 작품을 만드는 오솔길, 출렁이는 억새밭을 끼고 도는 산티아고 길 등 걷는 길마다 이름을 붙이고 매일 가슴 설레는 산책에 나섰다. 그곳에서 어렸을 적 친구들을 떠올리고, 학자로서 완벽하기 위해 욕심을 내던 자신도 만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픈 것으로 인해 힘겹고 슬프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바뀌게 되었음을. 항상 목표를 향해 달리던 것에서 벗어나 가는 여정 자체를 즐기게 됐음을. 심 명예교수의 에세이 <마음 저 들판, 길을 내고 걷다>는 유튜브 채널(중민세상, https://www.youtube.com/@joongmin_ibc)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 글자 수 1027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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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밭이 있는 흙길은 처음에는 그저 시골길 같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흙길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길은 길게 굽어 있어 동작대교에서 서래섬 쪽으로 걸을 때는 앞에 높은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시골 같은 호젓한 분위기가 금방 깨어지는 느낌이 있지만, 조금만 걸으면 길이 왼쪽으로 꺾이면서 콘크리트 덩어리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시 시골길 같은 분위기로 돌아온다.


반대로 서래섬 쪽에서 동작대교 쪽으로 걸을 때는 멀리 산이 보이고, 억새밭과 길가의 풀꽃들만 보인다. 정말 시골길 같다. 그래서인지 이 방향으로 걷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았고, 사진도 주로 이쪽에서 많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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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과 겨울 내내 흙길에서는 갈색의 억새밭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봄이 되니 흙길 양쪽으로 여러 가지의 풀과 꽃이 새록새록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끼풀로 뒤덮인 듯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보통 토끼풀보다 더 크고 분홍색 꽃이 피는 붉은토끼풀이었다.

여름으로 가면서 반포천 아랫길에 피어 있던 빨간 개양귀비 꽃이 이곳에도 피기 시작했다. 반포천에서는 멀리 언덕 위에 있는 것만 보았는데, 여기서는 바로 길가에 있어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색깔은 빨간색, 오렌지색 등 다양하고, 여러 색깔이 섞인 것도 피어났다.


한여름이 되자 불볕더위 아래 초록은 더욱 짙어지고, 자그마한 이름 모를 풀꽃들이 분홍색, 푸른색, 흰색으로 너도나도 피어나 서로 어우러져서 그 또한 싱그러운 여름다웠다. 그래서 이 길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언젠가 친구와 같이 이 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은 적이 있다. 단톡방에 올린 사진을 보고 한 친구가 "마치 산티아고 길 같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맞아. 이 길이 산티아고 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골의 흙길이기도 하고, 여름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야 하는 고행길이기도 했다. 겨울에는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견뎌야 하는 길. 내 마음 속에 푸석푸석 흙먼지가 날리는 길. 언제까지 걸어야 할지 모르는 길.


가만 보니 그 길을 내가 걷고 있었다.


-심영희, <마음 저 들판, 길을 내고 걷다>, 중민출판사, 1만5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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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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