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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미안하다,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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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실력이야. 니 부모를 원망해." 모든 건 여기에서 시작됐고 이 말에 응축돼 있다. 우리는 심해져가는 빈부격차가 다음 세대의 미래를 결정하는, 그런 사회로 굳어져가는 길목에서, 그 질주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영영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것 아니었던가.


지금 정권은 '기회는 평등'으로 시작하는 유명한 표어를 앞세우며 출범했다. 다시는 기업인을 협박하지 않겠으며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굳이 하지 않은 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과정의 공정'을 가운데 놓은 다짐은 우리가 가진 두려움과 소망을 제대로 읽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3년여가 지난 지금, 그들이 공언한 '결과의 정의'는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는가.

중요한 것은 불법이냐 합법이냐가 아니다. 정유라의 삶에서 불법적 요소를 모두 걷어낸다 해도, 좋은 세상이 절로 오는 게 아니란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평등·공정·정의의 세상과 범죄 영역 사이에는 합법으로 포장된 벽이 존재한다. 지난 20여년간 줄곧 높이를 더해온 그 벽은 합법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합법적으로 앞선 출발선이라고도 불린다. 평범한 우리는 군대에 전화를 걸어줄 보좌관도, 엄마 부탁에 스펙을 쌓아줄 대학교수 한 명도 알지 못한다.


"너보다 더 노력한다 해도 너를 이길 수 없어. 왜냐하면 너는 돈으로 실력을 사고 있으니까." 부모를 원망하라던 정유라의 일침은 이 비난에 대한 답변이었을 것이다. 금수저 자녀의 성공 역시 노력을 수반하므로, 그들은 노력의 정당성과 합법이란 울타리 뒤로 비겁하게 숨는다. 논란 속 정권 인사들과 그 자녀들의 항변은 정유라의 것보다 고급스러운 표현일망정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노력에 따라 자기만의 벽을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단지 공인이란 이유로 합법적으로 획득한 재력과 권력의 벽을 허물라고 강요할 수 없다. 우리 모두도 누군가보다는 높은 벽을 갖고 산다. 하지만 사회 도처의 벽들이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것이 최상위 일부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의 문제로 비화됐을 때, 발전의 원동력은 성벽(城壁)이 되어 공멸의 기폭제로 변한다. 그래서 자신의 합법적 대물림이 사회 모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더 많은 사람들이 자문하고 성찰하는 사회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서 그런 고민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정유라와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운동장과 출발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흔적만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것이 온 세상에 알려진 지금, 그들의 관심은 무죄를 입증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데 쏠려있는 듯하다. 자신의 위선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동체 연대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사실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인다. 법이 그어준 경계가 아니라 가치를 지향하는 신념이 잣대가 되는 사회를 만들자며 손을 내밀던 사람들, 그들이 기어이 우리 손을 뿌리치고 자신들의 성벽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들이 무죄일 수 있다. 알려진 것보다 경미하거나 고의적이지 않은 반칙 정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너머에 있다. 성벽 밑동에 남겨진 우리는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세상으로 되돌아와 불법적이지 않은 거대한 성벽, 그 밖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더 높고 두꺼워진 합법의 벽은 다음 세대의 삶을 더 혹독히 짓누를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검찰이 개혁되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출범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안해 사실은 돈이, 인맥이, 권력이 실력이었어." 그들의 비아냥이 담장 너머에서 메아리쳐 오는 것 같다.

사회부장 신범수

사회부장 신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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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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