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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넘어지는 사람을 보았다/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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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돌부리에 걸려 허우적거렸고 허공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겨울이었고 거리에 드문드문 눈송이들이 흩날렸다. 조금 전까지 그는 차음이 잘 되는 헤드폰을 꼈는지 자신만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동안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4층 건물 위의 햇살이 바닥을 더듬거렸고, 이별을 한 해사한 여자아이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신호동에 걸린 노란 택시 바퀴 안으로 한 줌의 바람이 매연과 함께 뒤섞이고 있었다.


그는 순간 도움닫기를 기다리는 체조 선수처럼 양팔을 수평으로 벌렸다. 오른쪽 손이 땅으로 곤두박질치자 왼쪽의 손이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그 반대쪽으로 팔을 파닥거렸다. 무게는 좌와 우 사이를 오가더니 고깃덩이를 단 저울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발목의 관절은 이미 뒤틀려 트위스트를 췄고 그사이 시선을 잃은 눈동자는 수백 수천 번을 허공과 땅바닥 사이를 오갔다.

그는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어쩌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축이었지만 그는 어느 쪽이든 넘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처음에 무너져 버렸던 방향과 지탱하던 방향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면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는 것보다 어느 쪽이든 넘어지는 것이 그가 선택한 이 세계였을까.


한남대교에서 잠실대교까지 걸으며 수없이 넘어지는 것들을 보았다. 구름이 구름을 잡고 넘어지고, 지나가는 자전거 사이로 바람이 뭉개져 넘어지고, 시계 속의 분침이 시침에 걸려 넘어지고, 새롭게 피어난 오늘의 희망 따위가 어제의 절망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고, 그렇게 모든 것들이 넘어지는 사이에 사위는 밟게 어두워졌다. 넘어지게 되자 더 잘 걷게 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자 어디서 피어났는지 새로운 꽃들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오후 한 詩]넘어지는 사람을 보았다/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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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다. 자꾸 넘어진다. 어느 날 문득 넘어진다. 치킨집이 넘어진다. 복권방을 가던 옆집 남자가 넘어진다. 세탁소 아줌마가 넘어진다.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나동그라져 일어날 줄을 모른다. 꽃잎처럼, 한번 진 꽃잎처럼, 단 한 번도 "선택"을 해 보지 못한 채 끝장난 꽃잎처럼. 그 위로 아직 넘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걷는다. 무심하게 바쁘게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려고 걷고 뛰고 달린다. 달리고 달린다. 넘어진 사람들이 납작해지고 납작해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발 "새로운 꽃들이 활짝 피기 시작"하듯 넘어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치킨을 굽고 세탁을 하고 피자를 배달하고 복권을 사러 갔으면. 아니 그저 다시 살아나기라도 했으면. 제발.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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