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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유서(遺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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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도 아시아경제 정치부장

[데스크칼럼] 유서(遺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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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뉴스를 봤니? 대체 왜 투신을 한 건지….”
“무슨 말씀이세요.”

딱 4년 전의 일이다.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7월, 오전 발제를 마친 내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선배는 다짜고짜 뉴스 얘기부터 꺼냈다. 목소리에는 차마 표현하지 못한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허물없이 지내던 취재원이 한강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는 내게도 취재원 이상의 존재였다. 앞서 국토해양부를 출입하던 시절 처음 인연을 맺었고, 고인이 산하 공단 수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종종 시간을 내 서로의 고민을 나누던 막역한 사이였다. 지난 2014년 이른바 ‘철피아(철도마피아)’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자살한 고(故) 김광재 전 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의 얘기다.

고인과 남다른 인연을 맺은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지난 2010년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놓고 부산 가덕도와 경남 밀양을 대상으로 벌인 타당성 조사가 고리가 됐다. 고인은 당시 주무 부처인 국토부의 항공실장이었다. 외부 위원회가 주관한 타당성 조사 발표 하루 전날, 고인의 집무실에서 단 둘이 마주했다.

“오 기자님은 신공항이 추진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정치적 문제입니다. 위원회는 내일 전면 백지화를 선언할 것입니다.” 머뭇거리던 내게 그는 즉답을 던졌다.
철저히 통제되던 위원회의 심사 결과를 고인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종이었다. 하지만 고인의 정중한 '엠바고' 유지 요청에 응했다. 발표를 놓고 언론의 억측이 만발하던 때였다.

고인은 항공실장 재직 시절, 만날 때마다 한 대형 항공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곤 했다. 최근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이 화제가 된 바로 그 항공사다. 공단 이사장 시절에는 ‘귀족 노조’와 맞섰다. 방만한 경영을 바로잡고 건설 부채를 조기 상환하겠다는 약속도 어느 정도 충족하는 듯했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주변의 호불호는 늘 엇갈렸다.

자신감 넘치던 고인이 풀 죽은 모습을 드러낸 건 투신 두 달쯤 전이었다. 둘만 남게 된 술자리에서 “(정계 진출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끌려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의 갈등도 털어놨다. 노조의 퇴임 압박이 거세던 때라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하지만 고인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당시 들었던 ‘진실’에 침묵했다. 정치권 인사들의 압력과 청탁에 관한 단면이었다. 고인의 빈소에는 그를 쏙 닮은 외아들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쑥 고인을 떠올린 건 최근 타계한 고(故)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살아온 길과 방향은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 바로 유서의 내용이다. ‘누를 끼쳤다. 나로 인해 마음을 다쳤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후회와 자책, 그리고 한숨이다.
사실 그들이 받았다는 금품에 대한 평가는 가치중립적이다. 수십억 원 혹은 수백억 원을 받고도 괘념치 않는 여느 인사들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대가성도 아직 밝혀진 건 없다.

노 원내대표를 처음 만난 건 지난 2004년 17대 총선 직후였다. 재치 있는 ‘삼겹살 불판’ 발언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늘 겸손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을 출입했던 내게 고인은 촌철살인의 화법이 아니라, 자주파(NL)와 평등파(PD)의 양대 계파를 아우르던 화합의 아이콘으로 기억된다.

지난해 국회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고인은 내 손을 꽉 잡았다. “나중에 깨끗한 걸로 다시 드리겠습니다.” 이직한 뒤 쭈뼛대며 바지 주머니 속 구겨진 명함 한 장을 내밀던 내게 고인은 “괜찮다”고 웃으며 화답했다. 이후 국회 안팎을 오가며 마주할 때마다 가볍게 목례를 나눴을 뿐 예전처럼 진지한 대화는 오가지 못했다. 깊이 반성한다. 거대 정당 위주로 쳇바퀴를 돌던, 얄팍한 기자의 속물(俗物)스러움을….

삼가 두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을 둘러싼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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