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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카스텔로 디 롬바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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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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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는 양쪽 가슴뼈 사이에 ㅅ자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다. 급소여서 이곳을 잘못 맞으면 숨이 턱 막히고 사지에 기운이 빠져 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굳이 따지면 가슴과 배의 경계인데 적지 않은 사람이 가슴 한복판으로 인식한다. '화병(火病)'의 중심도 아마 이곳이리라.

 화병은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한스런 일을 겪으며 쌓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몸과 마음의 여러 가지 고통에 대하여 우리나라 민간에서 사용해온 병의 이름'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듯하며, 뛰쳐나가고 싶고, 뜨거운 뭉치가 뱃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증세와 불안, 절망, 우울, 분노가 함께 일어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고 한다.
 1997년 8월 31일, 일요일이었다. 나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있었다. 그날 오후 2인승 피아트에 시동을 걸고 카타니아에 있는 호텔을 떠나 아그리젠토를 향해 달렸다. 카타니아에서 아그리젠토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19번 고속도로다. 팔레르모까지 연결되는 이 고속도로를 타고 빌라로사 방향으로 달리다가 11번 지방도로로 빠지면 엔나(Enna)가 나온다.

 엔나는 시칠리아 섬 복판, 해발 900m쯤 되는 고지대에 있다. 인구는 2012년 현재 2만7914명이다. 여름 휴양지이자 농업 중심지이며, 근처에서 유황이 난다고 한다. 이 도시를 상징하는 건물은 카스텔로 디 롬바르디아(롬바르디아 성)다. 총면적 2만5000㎡, 성 아래는 로마의 여신 케레스를 위한 신전이 있다. 케레스는 농업과 곡물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 여신과 같다.

 시칠리아를 여행할 무렵 나는 10년째 특별한 병을 앓았다. 나의 20대와 30대를 온전히 지배해버린 그 병을 혼자만 앓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대학생 때 시인이 되었지만 이 기간에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통증을 지우기 위해 일만 했다. 동료와 경쟁하고 다퉜다. 다툴 때는 정도 이상으로 감정을 폭발시켰다. 10년차 기자가 되어 시칠리아에 갔을 때는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된 상태였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일요일. 아주 가까이서 인생과 죽음을 보고 배웠다.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퇴락한 고원도시를 한 방향으로 걸었다. 성벽 북쪽 난간에 서서 올리브빛 대지를 내려다볼 때, 명치를 틀어막은 뜨거운 무엇인가가 식도를 역류해 터져 나왔다. 눈을 감고 오래 서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몹시 중요한 순간이 고원에 부는 세찬 바람과 함께 나를 스쳐가고 있음을 알았다.

 성 아래 절벽에 굴을 파서 지은 중국 음식점이 있다. 주인에게 이백(李白)의 글을 써주었다. 붓을 적신 먹물은 가슴 저 아래 맺힌 응어리를 풀어낸 듯 고요히 번져 나갔다. 맨 아래 한글과 알파벳으로 이름을 적으며 명치 부근에서 피어오르는 박하향을 느꼈다. 주인은 고맙다며 시큼한 두부가 들어간 수프 한 공기를 더 내왔다. 그의 고향은 상하이라고 했다. 내 글씨는 아직 그 집에 있을까.

 그곳을 떠나면서 두 가지 기원을 했다. 주인과 그 가족이 행복하기를, 아픔 없이 다시 올 수 있기를. 인간의 육신이 대지와 닿아 있다면 나의 인연은 엔나-카스텔로 디 롬바르디아의 북쪽 성벽, 그 난간에 튀어나온 뾰족한 돌쩌귀에 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명치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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