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저자 박숙자
그들의 책 읽기 만큼이 지금 우리의 역사가 되죠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모든 의문은 열 두 글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누구이며 왜 사라졌는지, 또 책과는 무슨 상관이며 '읽기'라는 행위와 어떻게 맞닿아있는지. 다분히 옛날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삼중당문고 세대의 독서문화사'라는 부제를 달고 최근 출간된 박숙자 교수(47)의 책 이야기다.
저자 박숙자에 대해 알려진 사실로는 '속물 교양의 탄생(2012년 발간)'의 저자, 경기대학교에서 동서양 명작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문학도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와 네 인물 간의 연결고리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결국 첫 장을 열어 읽기 시작한 뒤에야 베일은 하나둘 벗겨진다. 누구보다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채 청년 시기를 보낸 그가 중년의 나이에 돌연 시대와 불화(不和)한 청년 4인의 꿈과 좌절을 면면이 들여다봤다고 한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4인의 부재가 그에게 떠안긴 숙제, 그리고 우리가 들어야 하는 그 '무엇'을.
박 교수는 지난 12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해방 이후 유신체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는 살아남지 못한 역사 그 자체였다"면서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이 있고, 이 중에 '청년'이 많았다"고 했다. 폐허만 남은 그 시절, 누구나 '제 몫'이 없는 '청년'으로 살아야 했던 점에 그는 주목했다. 그리고 당대 청년들의 독서문화를 해독함으로써 역사의 이면을 파헤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지층의 단면을 보고 지형의 변화를 짚어내는 지질학자처럼 그는 '문학'이란 탐침(探針)을 집요하게 활용했다.
4인은 각 시대를 상징하는 청년 개인이자 1950~1970년대와 오늘날의 청년들, 나아가 제 몫이 없는 모든 연령층을 품고 있다. 이념 과잉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 주인공 '준', 혁명의 뒤끝을 앓아야했던 김승옥 소설 '환상수첩'의 '정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전혜린, 인간답게 살고자 했으나 끝내 스러진 전태일이 남긴 유산은 그들의 '내일'이었다.
박 교수는 "이들은 다만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고, 또 책에서 만난 세계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들"이라면서 "'책 읽기'를 매개 삼아 그들이 살아간 세상과 마지막까지 꿈꿨던 '더 나은 삶'의 편린들을 손에 쥘 수 있다"고 했다.
박 교수가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시기는 2014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삼중당문고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독서문화사를 구상 중이던 그는 같은 달 발생한 세월호 참사(4월16일)의 비애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주제기획을 상당부분 바꿨다. 그는 "한 국가의 총체적 부실과 불신, 이런 것들에 대한 참담한 생각과 더불어 희생된 아이들을 생각했다"면서 "생애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 생명들에서 혜린, 태일 등 과거의 인물과 소설 속 주인공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살아남고자 했으나 살아남을 수 없었던 세월호 희생자들은 그에겐 네 인물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박 교수는 "사건 당시 일상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상태였던 게 다행스럽기도 했다"면서 "살아남지 못함에 대한 모든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지난 세대의 청년들과 세월호 희생자, 고(故) 백남기 어르신 등 우리사회 곳곳의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위해 지난한 시간을 연구 조사와 글쓰기에 바쳤다.
이 과정에서 오발탄(이범선)ㆍ혈서(손창섭)ㆍ아사녀(신동엽)ㆍ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전혜린)ㆍ자유부인(정비석)ㆍ별들의 고향(최인호)ㆍ씌어지지 않는 자서전(이청준)ㆍ겨울여자(조해일)ㆍ투명인간(성석제)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 50여권과 영화 '맨발의 청춘'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중가요 '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 다양한 텍스트를 사회문화현상과 맞물려 추적했다. 그러면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이 이 책을 통해 살아남기를 바랐다.
4년간의 여정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뭘까. 박 교수는 "리더(readerㆍ읽는 사람)가 되라"고 했다. 그는 "준, 정우, 혜린, 태일, 그들은 다른 세계를 엿본 리더(reader)였고, 또 다른 세계를 연결해 준 리더(leader)였다"면서 "그들이 읽기를 통해 상상한 만큼 현재 우리 삶의 지도가 단단해졌다"고 했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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