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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시간을 읽는 다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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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그대로 시가 되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분 입술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흘러나오는 말을 받아 적으면 그게 그대로 한편의 시입니다. 한번은 그분께서 동백꽃으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禪雲寺) 가는 법'을 일러주셨지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꼭 이와 같았습니다.

"선운사는 저그 전라도 고창이라는 곳에 있는디. 고창은 정거장이 ㅇㅡㅄ어. 서울역으서 기차를 타고 정읍까지 가야 해. 거그서 고창까지는 버스를 타지. 헌데 버스가 하루에 ㅁㅔㅊ 대 ㅇㅡㅄ어. 한참 기둘려야 해. 그래서 말인데… 차부 옆에 보면 주막이 하나 있네. 들어가서 막걸리 한 되를 시켜. 그 늠을 다 마시면 버스가 와."
 전라도 사투리로 느릿느릿 내려놓으시는 그 말씀을 옮겨 적으면 고스란히 당신의 시편으로 읽힐 것입니다. 버스 시간표나 배차간격을 말하는 대신 '막걸리 한 주전자를 다 비우면 버스가 온다'고 말하는 사람. 이분이 누굴까요. 미당 서정주 시인입니다.
도대체, 막걸리 한 되를 비우는 동안이 얼마나 되는 시간일까요? 물론 천차만별이겠지요. 마시는 이의 주량이 얼마나 되며, 누구와 마시는지, 무엇을 안주로 삼을지… 주모의 기분이 어떠한지, 옆 탁자에는 어떤 손님들이 와서 무슨 이야기로 웃고 떠드는지, 창 밖으로는 무엇이 내다뵈는지, 날씨는 어떤지….

막걸리 한 되의 시간을 어찌 시계로 재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꼭 읽어내야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따지고 지켜야 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스님과 시간 맞춰 만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 아래 민박집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닌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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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 술을 다 못 먹었는데 움직이는 버스가 보이면, 다급히 손을 흔들며 달려가면 됩니다. 술값도 못 치르고 버스에 올라도 괜찮습니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사흘 뒤 서울 가는 길에 다시 들르겠다고 하면 됩니다. 그날은 서울 가는 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막걸리 한 되를 마셔야 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막걸리 한 주전자를 비우고, 그 얼근하고 흥겨운 기분으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동시 한편을 읽다가 그것은 '막걸리의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의 지은이는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거리를 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할머니가 옛날 사탕을 하나 주면서, 사탕 하나에 든 달고 고소한 맛이 얼마나 긴 줄 아느냐고 물었다 맛의 길이를 어떻게 재느냐고 되물었더니, 걸으면서 재보면 운동장 열 바퀴도 넘는다고 했다 뛰면서 재면 스무 바퀴도 넘겠다고 했더니, 자동차를 타고 재면 서울에서 천안도 갈 거라 했다 (…하략) 곽해룡, 「맛의 거리」에서

퍽 흥미로운 발상이라서, 의문은 꼬리를 뭅니다. 밥 한 그릇으로 갈 수 있는 거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또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까지의 거리. 국밥 한 그릇의 거리. 피자 파이나 햄버거 하나의 거리. 라면이나 짜장면 한 그릇의 거리.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음 한 그릇과 다음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걷고, 달리고, 차를 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선배 한 사람은 만났다 헤어질 때면 이렇게 하직인사를 챙깁니다. "오늘 즐거웠네. 자, 누구네 집이 제일 먼가. 막차 놓치지들 말고 어서 헤어집시다. 나야, 뭐 걸어가도 된다네. '노들강변' 두 번 부르면 우리 집이야." 짐작이 가십니까? '노들강변' 두 번 부르면 닿는 거리.

저는 종종 그 선배 흉내를 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길을 걸을 때면 '노들강변'을 부르며 갑니다. 주로 네댓 번 부를만한 거리였지만, 열댓 번을 거푸 부르고 간 적도 있습니다. 아무려나, 1930년에 만들어졌다는 신민요 '노들강변'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가사가 일제강점기 만담가로 유명했던 신불출(申不出)의 솜씨라서 그럴까요.

이 노래를 부르다보면 '창씨개명'을 강요받은 그가 이름을 '강원야원(江原野原')으로 고치고 '에하라 노하라'로 부르게 했다는 일화까지 떠오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언짢은 기분은 금세 흐물흐물 자취를 감춰버리고, 유쾌한 기분은 한껏 고조됩니다.

음정과 박자의 눈금을 정확히 읽어내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노랫말을 따라 낭창낭창 휘어지며 걷다보면, 계절에 상관없이 춘흥(春興)이 일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 볼까/에헤요 봄버들도 못믿으리로다. 흐르는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노들강변을 몇 번 불러야 닿을까요? 우리가 기다리는 세월은 막걸리 주전자를 몇 개나 비워야 올까요?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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