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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터진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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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까지 저는 제 약력(略歷)의 첫줄을 이렇게 써왔습니다. '제천(堤川)에서 나고 인천에서 자랐다.' 요즘에는 이렇게 고쳐 쓰고 있습니다. "제천이 낳고 인천이 키웠다." 어느 날 문득, 앞 문장의 결함을 발견하고 나서부터입니다. '나고 자랐다'는 표현은 '마음대로' 세상에 태어나고 '제멋대로' 성장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사람이 어찌 절로 나고 자랄 수 있겠습니까. 깊이 뉘우칩니다. 그간, 저는 저를 낳아준 땅에 무심했습니다. 길러준 땅에 무례했습니다. 불손했습니다. 참으로 미안하게도 저를 낳은 산골의 기억은 다 잃은 척 했고, 사춘기의 구차스런 장면들은 슬며시 구겨버리기 일쑤였습니다. 뻔뻔하기도 했습니다. 젖먹이 시절을 보냈을 뿐이라며, 그곳에 대한 '기억 없음'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나를 부풀리거나 합리화하기 위해 쓸 만한 재료가 될 때만 키워준 곳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표일까요. 요즘은 누가 제 고향을 물어오거나, 그 땅이름이 눈에 띄고 귀에 들릴 때마다 그곳에 대한 채무의 규모를 가늠해보곤 합니다. 단번에 그 빚을 갚을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천천히 조금씩 갚아나가야겠다는 답으로 가상의 채권자들을 따돌리고 있습니다. 저의 필명 '제림(堤林)'이 제천 의림지(義林池)에서 건져온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시간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성장기를 다 보낸 곳인데다,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큰애를 낳은 곳이니까요. 그런데도 많은 기억을 버리려 했습니다. 떠올려보아야 초라하고 추레한 것들이 대부분인 까닭이었습니다. 고작 한 시간 거리지만 심리적으로는 대전보다 멀게 느껴지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직 거기 계시고 친구가 있는 곳인데도, 공항 이름처럼 무심히 부르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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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거리 이름들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차로 표지판에 적힌 낯선 도로명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잘못 들기도 합니다. 순간, 당혹감과 함께 야속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걸어서 오가던 학교 길에 누가 저런 이름을 붙여놓았을까?' '이 길이 언제부터 화도진로(花島鎭路)가 되고, 조금 전에 지나온 큰 길은 왜 제물량로(濟物梁路)가 되었을까?'
'화도진', '제물량'의 내력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둘 다 인천의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개항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에 중요한 명칭들이지요. 개화기엔 이 지역을 '국토의 인후부(咽喉部)'란 표현으로 지정학적 가치를 강조하곤 했습니다. 목구멍이나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지역이란 뜻입니다. 그런 군사적 요충 혹은 진지의 명칭이 이제 길 이름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길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강산이 몇 차례 변하는 동안 이곳에 큰 관심 두지 않고 그저 나그네처럼 오간 사람이 잘못이지요. 마음자세를 고쳐 잡으니 낯익은 이름들이 옛 친구네 문패처럼 반갑게 눈에 들어옵니다. 배다리, 참외전로, 큰우물 길…. 제가 먼저 알은 체를 하니 서점과 극장과 삼계탕집 그리고 제과점이 경계심을 풀고 눈을 맞춥니다.

때 묻고 냄새 나는 골목일수록 옛 모습이 더욱 역력합니다. 친구 어머니가 하던 어물전이 도드라져 보이고, 즐겨 찾던 우동집도 반색을 합니다. 지금은 신포동으로 불리는 '터진개'입니다. 갯벌 쪽으로 터진 땅이란 뜻이지요. 이곳만의 지명도 아닙니다. 엇비슷한 이름의 땅이 전국에 여럿이지요. 모두 유사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려나, 저는 그런 이름이 숨이 칵 막히게 좋습니다. 생모(生母)는 아니지만 그만 못할 게 없는, 길러주신 어머니 그 비린내 나는 치맛자락에 안기는 느낌입니다. 동시에 집이 어디냐 물으면 '개 건너'라고 답하던 친구의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삼삼하게 떠오릅니다. 친구의 집은 이름 그대로 갯벌 너머에 있었습니다. 소풍을 다닐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삶의 풍경이 그리 복잡할 것 없었으므로 작명의 방식도 참 간단했습니다. 수도국이 거기 있다고 해서 '수도국 산(山)'으로 불리는 달동네가 있었습니다. 기상대가 있는 마을이면 '기상대'라고 불렀습니다. 종교시설인 전도관(傳導館) 언저리에 살면 '전도관 산다'고 말했습니다.

심플했습니다. 일견 수선스럽고 무질서해보였지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셈법은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그 시절 그 어른들만 남아서 시골 면소재지처럼 헐거워진 옛 도심은 여전히 순박합니다. 누가 인천을 '짠물'이라고 했을까요. 인천은 짜지 않습니다.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을 넘어 차이나타운에서 신포(新浦)시장으로 걸어가 보세요. 어디나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동네에서 쓰이는 자(尺)나 저울의 눈금은 대개 손님 편일 것입니다. 터진개에는 갯벌의 습관처럼 퍼주고 나눠주는 일이 익숙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요.

'터진개'는 아무 것도 숨기고 감추지 않습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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