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PEN)클럽이 마련한 작가대회에 초대를 받아 경주에 왔습니다. 폐막식 무대에서 시 한 편을 읽어달라는 부름입니다. 물론 즐겁고 행복한 일이지요. 그런데 약속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제 마음 한 구석은 점점 어둡고 불편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지진 때문이었습니다. 첨성대와 불국사와 원자력발전소의 안위(安危)가 궁금해지면서 걱정은 더 깊어지더군요.
'가뜩이나 어수선하고 뒤숭숭해진 도시에 한 편의 시가 어떤 의미를 전해줄 수 있을까?' 내려오기 전날까지 그 질문에 근사하게 답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공연히 이 책 저 책을 뒤지며 늦도록 잠을 못 이뤘습니다. 다행히 새벽녘에 답을 얻었습니다. 신라인의 노래 향가(鄕歌)에 생각이 가 닿은 것입니다.
서라벌 옛사람들은 나라 안에 흉조가 있거나 위급한 일이 생길 때면, 말의 신령함과 노래의 힘으로 화를 면하고 복을 불렀지요. 경덕왕 때,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타나자 월명사로 하여금 '도솔가'를 지어 부르게 했습니다. 진평왕 때는 융천사의 '혜성가'로 혜성도 쫓아버리고 왜병도 물러가게 했지요.
신라의 노래는 재난과 변고만 이기는 게 아니라, 간절한 희망과 기원을 현실로 이뤄주기도 했습니다. '서동요, 헌화가, 처용가' 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천지간에 사랑의 경계가 없음을 알게 하고, 나이도 신분도 뛰어넘은 순정어린 로맨스를 보여주었습니다. 병마(病魔)를 거느리고 다니는 귀신을 단박에 무릎 꿇렸습니다.
이번 작가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을 했던가봅니다. 아니, 향가의 정신이 모두를 흔들어 깨운 모양입니다. 국내외 각처에서 모여든 시인 작가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오늘 이곳의 어려움을 언어의 신통력으로 풀어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삼국유사가 '서동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시와 노래에도 '영험(靈驗) 있음'을 보이려는 뜻이지요.
마침내 '경주선언문'이 채택되었습니다. 문학과 문학인이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치유와 구원의 용기를 보이겠다는 다짐입니다. 겁먹은 아이와 노인에게 희망을 주고,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투지를 주려는 것입니다. 작가들이 삶의 존엄성과 문화의 소중함을 방해하는 불합리한 제도와 가치관을 개선하고 기록하는 시대의 사관(史官)이 되겠다는 결의도 들어있습니다.
조상님들이 그랬듯이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복시키고 긴절(緊切)한 언어는 어떤 존재와도 소통이 가능함을 보여주자는 뜻입니다. 저는 그런 의도를 제 무대에서 표현했습니다. 도인(道人)의 이름도 하늘 문의 열쇠임을 말하며 우리 시대 고승 효봉(曉峰)의 이야기를 시로 읽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땅의 흔들림이 아닙니다. 마음의 흔들림입니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제 땅과 제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죄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휴머니즘의 위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바르고 마땅한 생각들을 구겨버리는 비겁하고 졸렬한 생각들입니다.
어제 오늘 제가 만난 경주시민들은 대부분 비슷한 하소연을 하더군요. "호텔도 민박집도 식당도 찻집도 손님이 뚝 끊겼다, 주말이면 밀물처럼 몰려오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손가락 빨게 생겼다, 지진보다 인심이 더 무섭다…. 사람들이 더 야속하다. 아프다고 떠나간다면 그것이 어디 사랑이냐?"
왜 아니겠습니까. 아파할 때 보듬고 안아주어야 사랑이지요. IMF시절에 참으로 인상적인 의견을 제시했던 칼럼 하나가 생각납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글이었습니다. 궁핍의 세월을 견디려고 직장인들이 도시락을 싸갖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쓴 글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런 충고가 들어 있었습니다. "주부들이여, 남편의 도시락을 싸지 마시오."
시절이 어렵다고 도시락을 먹으면, 샐러리맨들을 바라보고 장사를 하는 그 많은 식당들은 결국 문을 닫으란 이야기가 아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과 누군가의 몰락을 맞바꾸려는 사고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지요. 한마디로, 사회적 발상의 전환을 주문하는 글이었습니다.
오늘 이곳의 문제가 꼭 그렇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경주는 우리 모두의 보물창고이며 급소(急所)입니다. 또 하나의 공동경비구역(JSA)입니다. 여기엔 이 땅의 자존심을 곧추세워주는 실물(實物)의 역사가 있고, DMZ처럼 조심스러우나 지켜내야 할 에너지의 우물이 있습니다.
경주가 건강하고 평화로워야 대한민국이 화평합니다. 석굴암이 무사해야 하고 바닷가에 아무 일이 없어야 합니다. 경주는 지금 너무나 크고 무거운 짐을 혼자 지고 있습니다. 짐은 나눠지고 일은 거들어야 합니다. 저마다 믿고 따르는 분께 기도해주시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십시오.
가을입니다. 저 새파란 하늘을 첨성대 혼자서 우러르게 하지 맙시다. 천년을 지켜온 계림의 소나무들도 가늘게 떨고 있습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