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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그들이 달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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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연일 35도를 넘는 찜통더위가 계속되니 열대야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대한민국 전체가 열대지방으로 변한 듯하다. 오늘은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라는데 이번 더위는 선선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폭염에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를 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종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까지 장장 50km가 넘는 거리다. 출발지와 도착지만 들어도 무슨 이유로 달렸는지 알 것 같다. 지난 8월17일 1244번째 수요 정기집회가 있던 날이다.
 달리는 사람에게 왜 달리냐고 물으면 각기 다른 이유를 댄다. 건강을 걱정해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달린다. 마음이 답답하고 걱정이 생길 때마다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도 있다. 지속적으로 달리기를 하면 심폐지구력이 향상된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짐작하듯 지난 수요일 새벽부터 한낮의 더위를 뚫고 달렸던 그들이 심폐지구력이나 아름다운 몸매를 위해 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억과 연대를 위한 평화마라톤'이라는 이름을 걸었다. 그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함께 연대하려는 마음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일본에서 온 8명의 시민단체 활동가와 러너들도 함께 달렸다. 대부분의 일본 참가자들은 반전과 반핵을 외치며 매년 나가사키에서 히로시마까지 평화마라톤을 뛰어온 베테랑들이다.
 사토 유시유키는 신일본스포츠연맹(New Japan Sports Federation) 국제 활동국에서 일하는 시민운동가이자 러너이다. 이번 마라톤 구간 내내 'No War'라는 깃발을 들고 뛰었다. 잠수교 남단에서 깃발을 들고 뛰는 건 불법이라고 저지하는 사복 경찰에게 깃발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깃발을 돌돌 말아 들고 끝까지 완주했다. 사토상은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을 개정해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바꾸던 그 시각 일본 국회의사당 주위를 뛰면서 몸으로 시위했다. 지난주에 들었던 그 깃발을 들고. 몇 바퀴를 돌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라톤 거리인 42.195km를 채우고 나서야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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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참가한 타케다 아키히코는 마라톤을 585번 완주했다. 앞으로 23년만(?) 더 달리고 100살을 채우면 그만 뛰겠다고 해서 그가 77세인 걸 알았다. 삼각지에서 출발한 마지막 구간에서 그는 힘이 빠져 맨 뒤로 처지기도 했지만 끝내 소녀상 앞까지 달려갔다. 그는 이번 행사가 있기 전 6월 말부터 수폭금지를 위한 평화걷기를 주최해 나가사키에서 히로시마까지 38일간 걸었다. 한마디로 몸으로 평화를 말하는 데 도가 튼 할아버지다.
 최연소 참가자는 초등학교 5학년 정지호 군이다. 필자의 막내아들이다. 별 생각 없이 아빠가 뛰라고 해 뛰었고 마지막 구간만 참여했는데도 다음 날 다리에 알이 배어 엉기적엉기적 걸으면서 아빠를 원망했다. 난생처음 수요집회에 참여한 막내가 뜨거운 태양에 오만상을 찡그리며 맨 앞에 앉아 김복동 할머니의 쩌렁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게 고마웠다. 그 아이에겐 1244번째 수요집회가 몸으로 참여한 최초의 집회가 될 것이다. 알이 배어 불편했던 몸의 기억을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걷지 않고 달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목적지에 보다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다. 속도가 왜 중요하냐고 물으면 달릴 때 온몸으로 인정해야 하는 자신의 (그리고 인간의) 한계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달리면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바삐 뛴다. 당장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견딜 만하게 몸의 저항이 누그러들지만 그렇다고 달리기 자체가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고통을 참아내는 능력이 늘어났을 뿐이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사람은 몸으로 시위한다. 그날 참가한 수많은 시민들과 활동가들은 달리기를 통해 어떤 숭고한 성취를 했다고 믿는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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