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에 나온 알프레드 히치콕의 <39계단>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억장치 중에서 초창기 장치들이 등장하면서 감명을 받기 시작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첩보영화다. 그 시절 스파이짓은 문서 도둑질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은 카메라로 서류를 찍거나 대화를 녹취하는 첨단 스파이 행위가 발각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영화는 1차세계대전 직전에 해군의 중대 기밀을 빼내는 스파이를 다뤘다. <39계단>은 그 스파이 집단의 비밀명이다. 세계대전을 발발하게 할 만큼 중요한 비밀을 이 사람들은 어떻게 빼냈을까.방대한 양의 문서를 훔치거나 그것을 카메라로 찍어서 넘기는 게 정상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히치콕은 기막힌 반전(反轉)을, 정상적인 방법의 뒤통수를 치는 방식으로 숨겨놓는다. 당시 그 도시에는 <미스터 메모리>라는 유명한 스타가 있었다. 그는 워낙 기억력이 좋아서 뭐든지 한번 보면 좔좔 왼다. 그 비범한 재능을 이용해 무대에서 기억쇼를 벌여 인기를 끌고 있었다. <39계단>은 그를 몰래 데려와 군사문서를 보여준 뒤 그와 함께 국경을 넘는다.
셰르셉스키는 루리야 박사의 연구실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30개의 단어를 들려주자 그는 즉시 그대로 외웠고 70개의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숫자를 수십 개 불러줘도 마찬가지였고 <나가사다마다마사나가다라바자사다아사차라자...> 같은 무의미한 음절로 된 무한히 긴 열을 읽어줘도 그대로 말했다. 문자 그대로 미스터 메모리였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였다. 기억의 용량도 끝이 없었지만, 한번 기억한 것을 잊는 법도 없었다. 16년 전 3월7일 오후2시에 내가 말해줬던 말 중에서 스물 여덟 번째 단어는 무엇이었느냐라고 물어도 척척 대답이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섣불리 짐작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이나 체계와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아마도 카메라나 녹음기가 저장하는 방식처럼, 특징들을 기호화하여, 촬영하듯 단순히 담는 방식의 기억 능력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문자를 축적하고 의미를 연관하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과는 달리, 카메라처럼 들은 것을 기억의 필름에 인화해놓는 그런 능력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남자가 그 남자였을까. <39계단>에 나왔던 기억쇼의 미스터 메모리가 셰르셉스키를 모델로 한 것일까. 존 버칸이 소설을 발표할 때인 1915년이면 셰르셉스키가 29세 때이다. 아마도 그가 암기의 재능으로 유럽에서 슬슬 유명해지기 시작할 때였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가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면, 이 첩보 스토리는 시시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 상태였을 때에 그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면, 소설화하기에 꽤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39계단>이 발표된 때인 1935년에는 셰르셉스키가 49세 때이니, 미스터 메모리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릴 무렵이었을 것이다. 물론 셰르셉스키와 미스터 메모리는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 능력이 신화를 이루던 시절과, 기계가 그 신화를 대행하기 시작하던 시절이 맞물린 접점에서, 이런 영화와 이런 사람이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요즘 디지털뉴스룸에 앉아 때로 가만히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카메라 붙은 휴대폰을 쥔 셰르셉스키가 되지 않았는가. 이 영상기억의 기적으로 우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많은 기억으로 행복해지기는 했는가.
빈섬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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