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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미래의 기억과 보살이야기(218)

최종수정 2014.11.17 07:13 기사입력 2014.11.17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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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뭐가 좋아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부처대변인도 아니면서 꼭 저 얘기를 한다. 미래의 기억. "불교는요, 미래의 기억을 깨우치는 가르침입니다." 미래의 기억요? 알 듯 말 듯한 말이네요. 과거는 기억하는데 미래는 어떻게 기억하지. 기억하려면 이미 지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오지 않은 날들을 기억하나요?

"보살이란 말이 있죠? 그게 바로 미래의 기억입니다." 나의 이 말에 더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보살은, 보디삿트바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소리베낌한 말로서, 깨달음을 공부하는 유정(有情)이란 뜻이다. 유정은 마음을 가진 존재이니, 바로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깨달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미 깨달은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공부하는 유정, 즉 보살이란 말을 쉽게 풀면 학생이란 뜻이다. 배우는 사람, 바로 그거 아닌가.

그런데 그냥 학생이 아니라, 원래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육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부처가 도가 통하기 전의 상태가 보살이다. 그런데 보살은 수행자 모두를 향한 비유가 되어, 부처처럼 깨달음의 상태로 나아가는 수행을 하고 있기에 모두가 보살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살이라면 부처처럼 나중에는 필시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이미 깨달은 바가 있는 이의 확정코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이미 미래를 기억하고 있다. 미래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가 아닌 미래를 기억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원력(願力)이 바로 불교의 수행인 셈이다.

시간을 개관하고 전체 시간 속에서 인간 본질의 '없음'을 찾아내는 힘을 기르는 가르침들은, 때로 너무 크고 너무 대단해서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불교는 우리의 인식들이란 것이, 현상이라는 한겹의 시간에 자주 고착되고 어지러워져 생의 진정한 진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철학이 오랜 동안 머리를 부딪치며 싸워온 문제 중에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있다. 세상은 이미 만들어진 프로그램인가, 아니면 생방송인가. 생방송이 정확하지 않다면 라이브무대인가. 불교는 이런 얘길 해준다. 시간 전체의 앞쪽에 서서 보면 자유의지론이 맞고 시간 전체의 뒤쪽에 서서 돌아보면 결정론이 맞을 거여. 즉 시작되기 전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난 뒤에 보면 운명론이 맞는 것처럼 보인당께로. 이거 대단히 광활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없애보고 자신이 죽어 없어진 뒤까지 마음으로 살아내어 그 형상을 들여다보게 하는 집요한, 명상법들은, 세상의 모든 것과 삶의 모든 것, 존재의 모든 것이, 시간 속에 부유하고 명멸하는 것임을 가리키는 단호한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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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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