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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몸에는 배꼽이 없다(48)

최종수정 2020.02.12 10:26 기사입력 2014.05.22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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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낱말의습격



<몸>이란 낱말이 있다.
몸? 그거 참 얄궂게 생긴 글자다.
외롭게 웅크리고 있는 거 같지 않은가?
가로로 좀 퍼진 얼굴에 짧고 불안한 목덜미
나처럼 숏팔에 가부좌로 틀어앉은 다리
텔레토비같이 생겼구먼.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글자엔
허리가 없다. 허리가 없는 몸이라?
그럼 배꼽도 없지 않은가?
허허 배꼽이 없다면 이 자는 어디서
태어난 몸인고? 순 후레자식 아냐?

몸,하고 소리내어 읽어보니
뇌 속에 뭔가 웅웅거린다.콧구멍 속의
공간에서 발원한 비음이 곧게 펴나가지 못하고
다시 웅크리며 목구멍 속으로 기어든다.
부드럽고 곱고 여리고 슬프고 외로운 소리다.
꼭 닫은 입술이 소리의 끝을 막아
내부에서만 진동하도록 만든다.
왜 몸은 이런 소리를 가졌을까?

그러고 보니 몸에 붙은 많은 것들이
한 글자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딱 한개의 글자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한 글자가 너무 많다.
입 속을 뜯어보니 혀도 한 글자,
침도 한 글자, 이도 한 글자
입을 닫고 바라보니 턱도 한 글자
뺨도 한 글자,그 아래 목도 한 글자다.
젖도 한 글자,손도 발도 배도 등도
팔도 뼈도 털도 모조리 한 글자다.
배꼽 아래 말 못할 무엇도 이제 보니
딱 한 글자다.
처음에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요즘의 전화번호를 붙이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두 자릿수 정도면 충분했으리라.
전국에 전화기가 50대 뿐이라면 굳이
세 자릿수가 필요할 리가 없다.
그런데 전화기수가 백만대를 넘고
천만대를 넘어버렸다.그러면 전화번호도
이 천만대를 구분하기 위하여
여덟자리는 필요하리라.이런 단순한 이치로
낱말의 글자수도 결정되지 않았을까?
처음에 눈에 가장 잘 띄는,
그래서 뭔가로 빨리 이름을 붙여 불러야할 것은
아주 짧고 쉽게 작명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한 글자 짜리 이름들은
원초적이고 기본적이고 다급하고
필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봐도 되리라.
몸에 붙은 많은 것들은 그래서
외글자 이름으로 지어졌으리라.

먹는 것, 밥.
누는 것, 똥.
입는 것, 옷.
신는 것, 신.
자는 것, 잠.
꾸는 것, 꿈.
세는 것, 돈.
중얼중얼, 말.
쓰는 것, 글.
모두 생략할 수 없는 삶의 기본빵이다.

사물 중에서도 맨처음 다가온 것들은
모두 외글자다. 해,달,별은 물론이고
빛,숲,물,불,풀,흙,쇠,길,뫼,꽃 모두
인간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들이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서 멀어져서
하나의 작위적인 혹은 인공적인 낙원을 만들 수 있다고 호언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결국 날마다
표현하는 언어는 그 삶의 처음을
언제나 껴안고 있는 것을.
늘 가끔 떠나고 싶어 미치는 마음의
속을 뜯어보면 혹시 저 외글자의 자연들에 대한
진한 향수가 아니었던가?
살이에 지친 마음은 언제나 저 외글자 속으로
내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사람도 외글자다.
나,
너,
그,
외토리들이 몸을 하나씩 타고앉아
부질없는 그리움의 아우성을 지른다.
얼마나 오래 껴안고 가야 버릴 나,이며 너,인가.
오로지 나를 위하여,너를 위하여
삶의 춥고 더움을 엮고 있지 않는가.

님,
그리운 사람도 한 글자다.가슴 속에
꺼질 듯한 촛불로 일렁이는
불안하고 안타까운 사람 하나.
불러버리면 늘 아쉬움이 남는,
그러나 그 이상 무엇이라 부를 것도 없는,
그저,님이다.
벗,아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웃거렸던가.
마음을 털어놓을, 넉넉한 가슴 하나
세상에 둔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인가.
그러나 그것이 어디 흔한가?
둘러보라. 벗. 외토리 글자 저 형상 그대로
이 지구 위에 하나의 벗이라도 있는가?

자아,동물들이 지나간다.
개.
소.
말.
쥐.
범.
새.
닭.
꿩.
뱀.

저 외글자의 짐승이나 파충류는
인간과 공서(共捿)하던 무리였다.
누가 더 잘난 거,못난 거도 없이
그저 동등하게 서로 하나의 정글을 이루며
지내던 친구들이었다. 인간은 처음엔 무서움으로
혹은 사나움으로 돌을 들고 저 동물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다급히 이름들을 불렀을 것이다.
단 한마디로 그들을 호명하며
밀림 속의 자기를 지켜나갔을 것이다.

낱말들에는 뜻하지 않게도
인간의 초발심들이 어른거린다.
저 외마디의 호칭 속에는
처음이었던 것들의 진상이 숨어있는 듯 하다.
옹알이하듯 외글자들을 천천히 발음해가노라면
무엇인가 경건하고 희망찬 느낌이 감돈다.
우리가 지어놓은 온갖 현상과 개념의 집,
온갖 상상력과 허구의 집,
그것들 뜯어보면 이 외글자들의 자잘한 변주일 뿐이다.
집? 그것도 한 글자 아닌가? 존재를 포옥 감싸는
감미로운 피난처.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진 생각의 난맥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느 날에
바라보는 이 단순한 문자의 비밀은
무언가 살아있음을 새롭게 한다.
깨단해진 눈으로 바라본다.
외글자를 만들어내던 첫사람의 마음으로
무명(無名)으로 서있던 숱한 사물들을.
세상은 아름답다.그 세상 아래
빛쬐고 있는 내 몸도 아름답다.
눈,코,입,귀,턱,뺨,목,배,손,발
곳곳 따뜻하게 설렌다.
만져보라.

몸에는 배꼽이 없다.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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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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