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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냉커피와 식은 커피의 차이(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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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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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커피와 식은 커피라. 그 두 말을 옆에 갖다 놓으니 묘한 울림이 일어난다. 두 커피의 수온(水溫)을 굳이 비교 측정해본 사람은 없었겠지만 얼른 짐작만 해봐도 냉커피가 더 차가울 것 같다. 그런데 냉커피를 마실 땐 기분 좋은 생기가 느껴지는데 식은 커피에는 마음을 언짢게 하는 냉기가 느껴지는 것일까. 더 차가운 것이 덜 차가운 것보다 더 식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여기엔 기대값의 비밀이 있는 듯 하다. 냉커피를 먹고 싶어서 주문했을 땐 그것의 차가움을 구매한 것이고 따뜻한 커피는 그것의 온기를 구매한 것이다. 전자에선 냉기가 기대값이었지만 후자는 온기가 기대값이다. 식은 커피는 온기라는 기대값의 차질이 빚어진 커피다.


여기엔 마음의 비밀도 개입한다. 냉커피를 먹고자할 때는 이미 마음 속에 차가움을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생겨나 있다. 그가 '식은 커피'를 주문했다면 흔쾌히 그걸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식은 커피는 대체로 팔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온도란 커피를 마실 때의 기분을 상승시키는 일정한 온도의 자극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냉기이든 온기이든 말이다. 그냥 뜨뜻미지근하거나 서늘하면 재미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커피를 사면서 그 온도의 자극까지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미리 그 온도를 짐작하고, 그걸 즐거움으로 읽어내는 마음의 준비를 갖춘다. 식은 커피는 그러니까 온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현실과의 불화의 문제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커피들의 함의는 좀더 상징적인 문제에 닿아 있다. 식은 커피는 시간이 개입되어 있는 커피다. 처음에 따뜻하던 것이 식은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그 커피를 마시려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커피가 식는 동안 일어났던 그 사건들은 그것을 마실 만한 여유를 빼앗아갈 만큼 꽤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이 굳이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마음의 혼란이나 슬픔 따위가 시켜놓은 커피의 존재까지를 잊어버리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커피가 식는 동안, 어떤 마음이 식었거나, 하나의 관계가 마치 어떤 암시처럼 함께 식어갔을지도 모른다. 식어가는 커피 앞에는 멍한 눈과 메마른 입술 속에 든 침묵과 눈 앞을 떠도는 담배연기같은 게 자주 있다. 요컨대 식은 커피는 작은 잔에서 발생한 온도의 상실 문제 만이 아닌, 인간의 문제, 삶의 문제가 그림자처럼 서성거리고 있다. 그것은 한창 가슴이 타오를 무렵, 그 열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끼얹는 냉커피의, 귀여움과 발랄이 짐작할 수 없는, 어둡고 쓸쓸한 시간의 문제이다. 식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이걸 냉커피라고 생각하지 뭐, 하고 마시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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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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