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친구와 반야탕에 대해 실없는 논쟁을 벌였다. 술 먹는 일을 머쓱하게 여긴 중국의 승려들이 그 음식을 은어(隱語)로 반야탕이라 부른다는데... 그게 논쟁이 된 건, 반야탕이라 할 때의 ‘탕(湯)’이 적당한 말이냐에 관한 나의 시비 때문이었다. 탕이란 우리 상식으로는 뭔가를 끓이는 음식인데, 지혜를 담은 물이라 해야 할 것을, 아예 지혜를 삶아 버렸으니, 그게 어설픈 비유가 아니냐. 이런 내 말에, 탕이 반드시 끓인 음식이어야 하느냐, 그렇다면 목욕탕의 냉탕은 왜 있느냐는 반론. 그러자 나는 원래 끓인 것으로 출발한 탕이, 목욕하는 물로 쓰이면서 일반화되어 거기에서 ‘냉’탕이라는 기이한 말이 나왔다고 재반론. 뭐 음주승들이 급조한 말일진대 거기에 탕이 적합하냐를 따지는 게 우습다는, 문제 자체의 부정. 반야수라고 하면 음식의 맛이 안나니 ‘국’의 의미인 반야탕으로 했을 거라는 정황 논리 등등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그러다가 내가 인터넷에 <반야>라는 말을 쳐보니, 한 기구한 여인이 나타난다. 반야(般若)는 그녀의 이름이다. 어찌하여 그녀는 이 불교틱한 말을 이름으로 붙이고 있을까. 불교에서 권장하는 지혜를 갖고자 애쓴 여인일까. 반야는 600여년 전 그러니까, 고려 말의 바람과 물결 속을 살아간 사람이었다. 우리가 흔히 '요승'으로 기억하는 신돈의 첩이었다.
반야의 얘기로 돌아가자. 신돈이 잘 나가던 시절의 얘기다. 공민왕은 어느 날 총애하는 측근인 신돈의 집에 비밀리에 행차를 한다. 이때 신돈은 자기의 어여쁜 애첩 하나를 왕에게 ‘선물’한다. 그녀가 반야다. 이 날의 인연으로 반야는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는다. 물론 그녀가 신돈의 여인이었기에 그녀가 낳은 아이가 '반드시' 공민왕의 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공민왕의 쿼트(quote)로, 그가 이 아이를 자식으로 확신하는 대목이 두 번이나 나온다. (1)"내가 일찌기 신돈의 집에 갔을 때 그집 여종과 내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경동시키지 말고 잘 보호하라."(신돈을 귀양보낼 때 왕이 그 측근에게 한 말) (2)"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까이 하였더니 이 아이를 낳았다."(신돈을 죽인 뒤 측근에게 한 말) 한편 이 아이가 신돈의 소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이후의 왕인 우왕과 창왕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성계 일파들은, 이 두 사람을 왕족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은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조작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으므로 그냥 참조만 하자.
왕의 아이를 낳은, 신돈의 애첩. 이 복잡한 줄긋기 만으로도 그녀의 착잡한 운명이 짚인다. 그 아이가 그냥 반야의 아들로 숨어 살았더라면, 오히려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녀에게 저 핏줄에 대한 자랑과 거품 부글거리는 희망이 없었다면, 권력 주변의 살기(殺氣)와 음모들을 만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왕자로 봉해진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잃고 수원으로 유배된 뒤의 일이다. 그가 섬겨온 주인을 잃은 반야는, 이제 벼락출세를 하게된 왕자에게 기대를 옮겼으리라. 그런데 공민왕은 자신의 부적절한 행각을 가리고 싶었던지, 이 왕자가, 죽은 궁인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공표한다. 생모 신분조차 인정받지 못한 반야는 얼마나 억울했으랴. 그녀는 아마도 왕자가 왕이 되기 만을 기다렸으리라. 1374년 반야의 아들은 우왕에 즉위한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