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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블로그]기러기 아빠들 밤새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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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경훈 기자]"인생의 끝 닿는 곳 무엇과 같은가 날던 기러기 눈 진흙 밟듯 하구나 진흙 위엔 우연한 발자국 남기고 기러기는 또 동서로 날아가네"

소동파(蘇東坡)가 온갖 풍상과 곡절 속에서 짧은 세상 살다가는 기러기를 우리네 인생에 비유한 글귀입니다.
기러기는 이처럼 문학작품이나 노래에서 인간사에 대한 비유로 자주 이름을 올립니다. 또 이별의 아픔이나 부부애를 상징하는 단골소재로도 자주 거론되는걸 보면 선인들의 기러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러기목 오리과의 철새인 기러기는 짝이 죽으면 홀로 여생을 마치고, 산에 불이나면 품은 새끼와 함께 타죽을 정도로 유별난 부부 금실과 자식 사랑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요. 요즘 기러기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비유는 뭐니뭐니해도 '기러기 아빠'가 아닐까합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과 아내를 이역만리 땅으로 유학보내고 혼자 남아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학비 보내느라 등골이 휘도록 일하는 중년의 가장을 빗대어 만든 조어입니다.

이런 기러기 아빠가 최근 한 50대 가장의 자살소식으로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이름을 올리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인천 계양구에 살던 이 가장은 지난 2009년 아내와 고교생 두 아들을 미국에 유학보낸 뒤 혼자 지내던 기러기 아빠였습니다. 전기기사였던 그는 경기불황으로 일감이 줄면서 실직을 반복해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는데 미국행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 지난 4년간 가족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막히는 세상이다'라는 내용의 유서는 고단했던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평균 418만원. 지난해 기준으로 기러기 아빠들이 유학간 자녀와 아내를 위해 보내주는 월평균 송금액이라고 합니다. 2004년부터 매년 평균 2만2000여 가구가 새로운 기러기가족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는 교육부의 통계자료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처량한 외기러기같은 아빠들이 얼마나 많은 지 짐작이 되는데요. 뻔한 수입에서 90% 이상 보내주고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아빠들의 고단함과 외로움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험난할 게 뻔한 고행의 길을 기꺼이 걷고자 하는 '예비' 기러기 아빠들은 주위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금 세태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우골탑'도 부족해 가족해체까지 무릎쓴 기러기 아빠로 업그레이드 된 비정상적인 교육열로 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해 20조원 가까운 돈이 사교육비로 빠져나가고 있는 현실의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 교육을 향한 뿌리깊은 불신에 대한 성찰이 먼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  

'평사낙안(平沙落雁)'. 글이나 문장이 매끄럽게 잘 마무리 됐음을 표현하는 말이라는데 '기러기가 편평한 모래밭에 내려앉는 모습'이란 뜻입니다. 기러기 아빠들의 고단한 삶이 이 사자성어와 같길 바랍니다만 여전히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여 씁쓸할 따름입니다.





김경훈 기자 styxx@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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