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짐승들의 사생활-13장 떠나가는 사람들(221)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짐승들의 사생활-13장 떠나가는 사람들(221)
AD
원본보기 아이콘

하림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영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림은 단지 참고인 신분에 불과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경찰에서는 개를 쏘아 죽인 사실 보다는 그날 있었던 총기 사고에 더 관심이 맞추어져 있었다. 엽총이라지만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다 피해자가 병원에 누워 있었다. 자연히 그날 심문은 이층집 영감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다 따라온 송사장이 뭐라 하고 갔는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영감은 입을 꼭 다물고 소파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한 인간에겐 하나의 역사가 있다. 아무리 초라하게 늙은 인간이라 해도 한 세상을 살았다면 한 세상을 살아온 만큼의 역사가 있게 마련이다. 밀랍 인형 같이 앉아있는 영감의 얼굴에도 그런 세월의 범할 수 없는 흔적 같은 것이 보였다.

언젠가 남경희가 말했다.
‘아버진 전역을 하시고나서 당시 모시고 있던 중대장, 그분은 나중에 대령으로 예편을 하셨는데, 그분과 군납하는 일에 관여를 하셔서 덕분에 돈도 꽤 버셨지요. 한창 경제개발의 와중에 살아갔던 사람들이 다 그렇듯 정신없이 일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외치며 살았죠. 한참 잘 나가실 때였어요. 그렇게 우리 아버지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이가 드셨고, 늙으셨어요.’

그냥 그렇게 늙어갔다면 어쩌면 그 역시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늙은이 중 팔자 좋은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경희의 말에 의하면 그는 늘그막에 남은 그의 생애를 뒤흔들어놓고 말 사건에 마주쳤다. 젊은 시절의 추억을 찾아 늘그막에 찾아간 베트남에서였다. 거기에서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죄악의 기억, 학살의 기억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곳 옛날 격전지 마을 입구에 서있던 <한국군 증오비>였다.

남경희가 말했다.
‘베트남 중부에 있는 꽝남성 안빈 마을인가를 찾아갔을 때였죠. 아버지가 직접 참여했던 전투지역이라 꼭 한번 들러보고 싶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마을 입구 황량한 벌판에 비석이 하나 서있었어요. 아버지는 가이드를 따라 무심코 그 비석 앞에 섰는데, 그 비석엔 <한국군 증오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어요. 가이드가 그곳에 새겨진 글을 다 읽어주는 동안 우리 아버진 그 앞에서 그만 털썩,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고 말았다고 해요. 자신이 평생 믿어 왔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드셨던 거죠. 우리 아버진 선량하고 원칙적인 분이라 그 후 무척 괴로워하셨답니다. 술이라도 자시면 혼자, 우리가 그때 몹쓸 짓을 저질렀어, 하곤 중얼거리곤 하셨죠. 생각해보세요. 자기 청춘의 자랑스런 추억들이 있을 수 없는 죄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말이예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우리 아버지 역시 드러내놓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 모종의 추악한 일에 관련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해요. 빨래하러 나온 베트남 여성들을 강간하고....죽인 사건이지요. 그 사건으로 몇 명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마침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예외가 되었죠. 하지만 그 일은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남겨졌을 거예요. 카인이 어딜 가서 숨던지 그의 이마에 새겨진 죄의 표시, 동생을 돌로 쳐 죽인 그 용서받지 못 할 죄의 표시가 영영 지워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그 후 아버지는 열심히 교회에 나가셨어요. 무언가에 매달린 사람처럼 말이예요. ”

바람 불던 날 그녀가 해주었던 말들이 그대로 떠올랐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 굳건한 1위 뉴진스…유튜브 주간차트 정상 [포토] 외국인환대행사, 행운을 잡아라 영풍 장녀, 13억에 영풍문고 개인 최대주주 됐다

    #국내이슈

  • "제발 공짜로 가져가라" 호소에도 25년째 빈 별장…주인 누구길래 "화웨이, 하버드 등 美대학 연구자금 비밀리 지원" 이재용, 바티칸서 교황 만났다…'삼성 전광판' 답례 차원인 듯

    #해외이슈

  • [포토] '공중 곡예' [포토] 우아한 '날갯짓' [포토] 연휴 앞두고 '해외로!'

    #포토PICK

  • 현대차 수소전기트럭, 美 달린다…5대 추가 수주 현대차, 美 하이브리드 月 판매 1만대 돌파 고유가시대엔 하이브리드…르노 '아르카나' 인기

    #CAR라이프

  • 국내 첫 임신 동성부부, 딸 출산 "사랑하면 가족…혈연은 중요치 않아" [뉴스속 용어]'네오탐'이 장 건강 해친다?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