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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명 칼럼]'중산층 70% 재건' 공약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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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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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 속 나라'에 '붉은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나온다. 그곳에선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여서 누구든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려고만 해도 죽을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 조금만 속도를 늦추면 뒤처진다.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우리나라 중산층의 처지가 그랬다. 모두 죽도록 달렸지만 뒤처지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는 대선 때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내건 '중산층 70% 재건' 구호가 힘을 발휘한 배경이다. 50대가 박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투표결과는 그들이 어느 연령대보다 '붉은 여왕 효과'에 짓눌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야당 후보도 중산층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소구력에서 박 후보에 미치지 못했다. 70%라는 수치를 박아넣은 그의 중산층 재건 구호는 강렬했다.
선거가 일으킨 분진이 가라앉은 지금 돌아보면 허망한 느낌도 든다. '중산층'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한 데다 '70%'라는 목표비율의 기준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한자어 뜻은 '재산을 중간 정도로 가진 계층'이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 집을 소유하고 소득도 먹고 살기에 걱정없을 정도여서 여유있는 삶을 누리는 계층'을 중산층으로 생각한다. 이런 중산층의 비중이 70%라면 상당히 안정된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박 당선인이 말한 '중산층'은 이런 의미가 아니다. 그는 '중간소득층'을 '중산층'으로 지칭한 것 같다.

자기 집이 있든 없든, 자산과 부채가 얼마나 되든 소득이 중위소득의 50~150%이기만 하면 '중간소득층'이다. 따라서 2011년 가구소득이 월 중위소득(350만원)의 50~150%(175만~525만원)인 가구는 모두 중산층이다. 이런 '중간소득층' 통계는 국제 기준에는 부합하지만 우리 국민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산층'과 다르다.

현대경제연구원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은 4인가족 기준 월 가구소득이 494만6000원은 넘어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가 공약대로 중산층 70% 재건을 실현해도 그 70%에 속하는 인구 중 실제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비중은 절반은커녕 4분의 1에도 못 미칠 것이다.
'70%'의 기준이 뭔지를 박 당선인이 말한 적도 없다. 다만 공식 통계기관인 통계청의 관련 통계가 있으니 그것을 참고했으리라 추측된다. 이에 따르면 '도시 2인이상 가구 중 가처분소득 기준 중간소득층 비중'은 1997년 IMF 사태를 계기로 70%를 밑돌기 시작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66%까지 내려갔다가 다소 회복돼 2011년 68%를 기록했다. 2%포인트만 더 높이면 중간소득층 70% 재건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준을 '가처분소득'이 아닌 '시장소득'으로 하거나 '도시 2인 이상 가구'가 아닌 '전체 가구'로 하면 중간소득층 비중이 몇 %포인트씩 더 낮아진다. 그러나 IMF 사태 이전까지 시계열이 소급되는 기준은 '가처분소득'과 '도시 2인 이상 가구'뿐이다.

중간소득층 비중 2%포인트 확대도 거저 될 일은 아니지만, 이명박 정부의 부자 감세와 대기업 지원 정책만 철회해도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이렇게 보면 박 당선인은 공약을 참으로 겸손하게도 내걸었다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박 당선인의 '중산층 70% 재건' 공약을 국민 대부분이 그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다. 인터넷에서 '중산층의 기준이 뭐냐'는 논쟁이 확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혼선을 없애려면 이 공약을 수치상 기준이 분명하고 검증가능한 정책목표로 재정립해 밝힐 필요가 있다. 훗날 '중산층 70% 재건'이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눈 가리고 아웅 정책'이었다는 평가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주명 논설위원 c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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