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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조삼모사 정책과 샐러리맨의 유리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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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명훈 주필]조삼모사(朝三暮四)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멍청한 원숭이다. 먹이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는 말에 화를 내던 원숭이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겠다니까 좋아했다는 중국 송나라 때의 고사다. 간교한 꾀에 농락당한 원숭이를 조롱하는 얘기다.

요즘에도 조삼모사는 들어 맞는 말일까. 세상이 달라졌다. 조삼모사에 화를 낸 원숭이는 멍청한 게 아니라 영악한 원숭이다. 우선 미래가 불투명하다. 아침이 편안하다고 저녁까지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다. 먹이를 주는 주인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 저축은행 사태에서 우리는 보았다. 힘 있는 자들은 영업정지 전날 밤, 편법으로 재빠르게 맡긴 돈을 빼내갔다. 다음 날 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만 속절없이 당했다.
현대는 시간이 곧 돈이다. 시간이 지나면 돈 값은 떨어진다. 은행이 자비심으로 맡긴 돈에 이자를 붙여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아침의 세 개와 저녁에 받은 세 개의 가치가 같을 수 없다. 시간의 길이를 한 달, 1년으로 늘려 생각해보면 '조삼모사'보다 '조사모삼'의 유리함이 확연해진다.

샐러리맨들은 이달치 월급을 받을 때 조삼모사의 작은 기쁨을 누리게 됐다. 정부가 지난주 내놓은 내수대책에서 근로소득세 원천징수액을 10% 줄여주기로 한 때문이다. 이에 따라 월급 500만원 받는 4인 가족 근로자의 경우 세금을 월 2만8470원 덜 내게 된다. 1월부터 소급이 가능하니 많으면 이달엔 20만원가량 월급을 더 받게 됐다. 그 돈을 잘 써서 내수 살리기에 힘을 보태 달라는 게 정부의 뜻이다.

월급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봉투가 두툼해진다니 마술도 보통 마술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놀라운 마술도 보자기를 벗기면 속임수로 드러나는 법. 정부가 내놓은 '경기부양 근소세 간이세액표'란 마술도 그렇다. 세금을 적게 떼면 연말정산 때 돌려받는 세금이 그만큼 줄어든다. 정부는 이번 조치로 세수가 1조5000억원 감소한다고 밝혔다. 그 말을 뒤집으면 샐러리맨들이 1조5000억원을 정부에 선납했다가 정산 때 돌려받게 돼 있었다는 얘기다.
조삼모사 아니냐는 비판이 일자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조삼모사가 맞긴 맞다"면서도 토를 달았다. "월급날이 말일에서 15일로 앞당겨진 것으로 이해해달라. 그만큼 근로자들이 기간이익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봉급쟁이 입장에서 보면 적반하장, 뒤집힌 논리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번에 줄어든 세금 10%는 연말정산에서 돌려받게 될 돈이다. 안 내도 되는 세금이란 얘기다. 그러니 그동안 손해본 것은 근로자요, 기간 이익을 얻은 것은 정부다. 이를 잘 알면서도 정부는 오랫동안 근로자 세금을 더 거둬갔고, 환급액에 이자 한 푼 붙여 주지 않았다. 정부가 이번 조치에 '근로소득 원천징수 합리화'라 이름 붙인 것은 '불합리 징세'에 대한 뒤늦은 고백이다.

조삼모사 정책이 나왔을 때 국세청은 고액체납자의 호화생활 백태를 공개했다. 그들은 수십억원, 수백억원의 세금을 떼먹고도 해외 휴양지를 돌며 유유자적했다. 탈세범, 체납자를 추적한 국세청 노력은 가상하지만 유리봉투 샐러리맨 입장에서는 씁쓸한 여운이 따른다. 근로자에게서는 월급봉투를 쥐어보기도 전에, 실제 내야하는 세금보다 더 많이 떼어가면서 거액 체납자들에게는 왜 그렇게 무력했을까. 그들은 어떻게 해외여행을 밥 먹듯 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국세청을 조롱하며 휴양지 골프장을 활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하고 소심한 샐러리맨들. 국회의원처럼 자신의 월급을 제 손으로 올릴 재주도 없다. 고액 체납자처럼 세금 안 내고 버틸 배짱도 없다. 그저 다시는 조삼모사 원숭이 취급을 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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