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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1987년 6월과 대선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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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대학에서 만난 그는 잘 웃고 씩씩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시절, 그는 늘 시위대 선두에 서 있었다. 졸업 후 대기업에 들어가서는 해외 오지 근무를 마다하지 않는 맹렬 사원이 됐다. 급기야 승진 가도를 달려 친구 중 가장 먼저 부장 자리에 올랐다.

25년 전 여름,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일복이 터진 30대의 대기업 부장. 그런 그가 다시 대학 시절 시위꾼으로 돌아가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사무실을 나와 시청 앞이나 광화문의 시위 현장으로 달려갔다. 신촌, 여의도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일찍 끝난 날은 직원을 몰고 정권 규탄 대회장으로 향했다.
그해 6월 한반도는 반독재ㆍ직선제 쟁취 함성으로 뜨거웠다. 야당, 재야, 대학생에서 비롯된 민주화 열망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시위 현장에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와이셔츠 차림의 직장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심한 책상머리 샐러리맨들이 분노하고 길거리로 나선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넥타이 부대'의 출현은 국민적 저항을 알리는 시위의 전환점이 됐다.

6월 항쟁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4ㆍ13 호헌 선언에서 발화됐다. 두 대학생의 죽음이 기름을 부었다. 물고문 도중 숨진 박종철 군, 시위 중 최루탄 파편에 쓰러진 이한열 군(6월9일 뇌사 상태에 들어가 7월5일 숨졌다)이 그 들이다. 1987년 6월10일 오전 6시. 대한성공회 성당의 종이 울리자 전국에서 고문 살인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됐다. 명동 일대엔 넥타이 부대가 운집했다. 상인들은 음료수를 들고 나왔다. 친구도 그날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모두 일어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6ㆍ29 선언'을 끌어냈다. 시민군의 승리였고 그는 최일선에서 싸운 무명용사의 한 명이었다.

친구의 식지 않은 의기와 용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말은 엉뚱하게 나왔다. 너, 대기업 간부가 길거리를 헤매고도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하구나. 해를 넘기고 다시 만난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얼굴은 어둡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우리가 왜 싸웠느냐, 무엇이 민주화냐. 두 김 씨는 갈라서고, 어부지리로 군 출신이 또 대권을 잡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만큼 실망도 크겠지. 그런 정도로 생각했던 나에게 얼마 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잘나가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가 홀연 이민을 떠난 것이다.
25년이 흘렀다. 그때처럼 올해 6월도 뜨겁다. 대선 레이스에 불이 붙은 까닭이다. 출마 선언이 줄을 잇는다. 인물은 다르지만 내건 구호는 대동소이하다. 그래도 12월 대선의 뚜껑이 열리면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겠지. 친구처럼 크게 상처 입을 징후가 있는 사람이라면, 1987년 이후 정치판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끝내 갈라섰던, 그래서 친구가 분노했던 두 김 씨(김영삼ㆍ김대중)는 드라마 같은 곡예를 거쳐 모두 대통령에 올랐다. 군사독재 정권과 목숨걸고 싸웠던 두 사람이 대권을 위해 손잡은 세력은 다름아닌 12ㆍ12 쿠데타 주역과 5ㆍ16 쿠데타 주역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정치의 맨살인지 모른다. 프로 정치판은 아마추어 유권자의 순진성을 예사로 농락한다. 권력욕을 달콤한 언사로 위장한다. 교묘한 편 가르기로 보통사람의 가슴에 적대감과 증오심을 심는다. 정치판에 분노하고 떠난 친구는 결국 불행해졌다. 하지만 그를 절망케 한 정치인들은 멀쩡했고 잘나갔다.

올해 대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말처럼 정치가 달라질까. 눈 크게 뜨고 지켜보자. 다수의 뜻이라면, 차선이라도 박수칠 준비를 하자. 지나친 흥분과 애증은 금물. 편 가르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 휘둘리면 상처를 입는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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