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여름,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일복이 터진 30대의 대기업 부장. 그런 그가 다시 대학 시절 시위꾼으로 돌아가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사무실을 나와 시청 앞이나 광화문의 시위 현장으로 달려갔다. 신촌, 여의도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일찍 끝난 날은 직원을 몰고 정권 규탄 대회장으로 향했다.
6월 항쟁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4ㆍ13 호헌 선언에서 발화됐다. 두 대학생의 죽음이 기름을 부었다. 물고문 도중 숨진 박종철 군, 시위 중 최루탄 파편에 쓰러진 이한열 군(6월9일 뇌사 상태에 들어가 7월5일 숨졌다)이 그 들이다. 1987년 6월10일 오전 6시. 대한성공회 성당의 종이 울리자 전국에서 고문 살인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됐다. 명동 일대엔 넥타이 부대가 운집했다. 상인들은 음료수를 들고 나왔다. 친구도 그날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모두 일어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6ㆍ29 선언'을 끌어냈다. 시민군의 승리였고 그는 최일선에서 싸운 무명용사의 한 명이었다.
친구의 식지 않은 의기와 용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말은 엉뚱하게 나왔다. 너, 대기업 간부가 길거리를 헤매고도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하구나. 해를 넘기고 다시 만난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얼굴은 어둡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우리가 왜 싸웠느냐, 무엇이 민주화냐. 두 김 씨는 갈라서고, 어부지리로 군 출신이 또 대권을 잡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만큼 실망도 크겠지. 그런 정도로 생각했던 나에게 얼마 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잘나가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가 홀연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정치의 맨살인지 모른다. 프로 정치판은 아마추어 유권자의 순진성을 예사로 농락한다. 권력욕을 달콤한 언사로 위장한다. 교묘한 편 가르기로 보통사람의 가슴에 적대감과 증오심을 심는다. 정치판에 분노하고 떠난 친구는 결국 불행해졌다. 하지만 그를 절망케 한 정치인들은 멀쩡했고 잘나갔다.
올해 대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말처럼 정치가 달라질까. 눈 크게 뜨고 지켜보자. 다수의 뜻이라면, 차선이라도 박수칠 준비를 하자. 지나친 흥분과 애증은 금물. 편 가르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 휘둘리면 상처를 입는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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