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찬주씨가 대한불교 조계종 안국선원의 선원장 수불 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수불 스님, 안국 선원 신도 100여명과 중국 강호 선찰 순례길을 함께한 정씨는 "선찰들을 순례하며 정신적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유동영 작가.
[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꽃 이름 따위를 알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돈벌이에는 아무런 보탬이 안될텐데.'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어느 봄날 미국 대학생들 몇몇과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던 얘기를 하며 이 같이 전한다. 당시 캠퍼스 기슭에 있는 숲엔 야생화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 야생화 가운데 어느 것 하나의 이름이라도 제대로 아는 학생이 없었다고 말한 러셀은 '하기야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러셀은 진작부터 자본주의에 찌든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며 이젠 행복해지려 노력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 것이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 조계사에서 만난 정씨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맑은 얼굴이었다. 옛 선사들이 주석했던 중국 강호(江湖)의 선찰들을 순례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진 것이었을까. 정씨는 중국 순례길의 끝에 얻은 깨달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정신적인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영혼의 무한한 양식이 그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남악 회양 선사, 마조 도일 선사 등이 머물렀던 사찰을 다니며 그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신심을 더 깊게 한 건 같이 간 사람들과 나눈 대화였다"며 "기독교 신자였던 대기업 임원,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쳤던 교수, 전직 여배우 등 자본주의의 축복인 양 물질적 풍요만을 누리던 사람들이 참선공부를 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또 삶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가장 큰 깨달음"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수불 스님의 말씀처럼 과거의 선승들은 찾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을 단숨에 둘러볼 수 있는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수행을 게을리 한다면 큰 죄를 짓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순례를 한 12곳의 선찰과 유적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묻자 정씨는 망설임 없이 '황벽사(黃檗寺)'를 꼽았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의 눈을 피해 창고 형식으로 지은 황벽사 법당이 인상 깊었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겉모습과 내부 모두 절이라기보다는 창고 건물에 가까운 이곳을 수십년 동안 지켜 온 황벽촌 사람들의 노력이 눈물겹다"며 "60년대에 봤던 서커스단 가설 무대 같은 곳에서 흙바닥에 방석을 놓고 예불을 드렸던 그 시간과 황벽선사 묘탑에서 유장하게 펼쳐졌던 수불스님의 법문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정씨가 글을 실은 '행복한 禪여행'엔 복엄사, 남대사, 밀인사, 백장사, 황벽사, 우민사 등 중국 강호의 선찰에 주석했던 옛 선사들이 남긴 공안(公案)과 가르침들이 금싸라기처럼 담겨 있다. 단순히 절을 둘러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옛 선사들의 가풍을 접하고 순지(順支)선사 등 신라 구법승들의 흔적을 찾는 데까지 나아가려는 정씨의 노력이 곳곳에 엿보인다. 사진작가 유동영씨의 사진이 선찰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전한다.
행복한 禪여행/ 정찬주 지음/ 미들하우스/ 1만5000원
성정은 기자 j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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