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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K] 이운재와 그랑블루의 애틋했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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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수원삼성블루윙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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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익숙한 모습이었다. 골문 앞에 우뚝선 수문장. 푸른 함성을 등진 그의 모습. 빗발치는 슈팅은 어김없이 거미손 앞에서 힘을 잃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그의 색깔은 '청백적'(수원 유니폼의 세가지 컬러)이 아니었다. 선방이 이어졌지만 특유의 세레모니는 보이지 않았다. 관중석 역시 환호보단 만감이 교차하는 탄식을, 때로는 침묵을 보냈다.
최종 스코어 2-1. '약체' 전남이 '대어' 수원을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이운재와 그랑블루는 그렇게 반년만에 다시 만났고, 헤어졌다.

◇ 거미손, 노란 유니폼을 입다

그랑블루에게 이운재는 스타 그 이상의 선수였다. 1996년 1군 데뷔 이래 4번의 리그 우승을 비롯,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선사해준 장본인.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속에서도 그는 자랑스러운 수원의 얼굴이었다. 2008년엔 주장을 맡아 골키퍼 최초로 K리그 MVP(최우수선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빅버드 역사 자체였다.

축구팬에게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다른 색 유니폼을 입은 '영웅'을 바라보는 건 새 사랑을 시작한 옛 애인과 마주하는 기분과 다르지 않다.
남녀 사이에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있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헤어짐이 있다. 후자의 경우를 축구계에선 '유다 신드롬'이라 부른다. 예수를 배반한 제자 유다의 이름에서 비롯된 말이다. 솔 캠벨이 그랬고, 루이스 피구가 그랬다.

[사진=전남드래곤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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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재와 그랑블루는 철저히 전자였다. 윤성효 감독은 부임 이후 매너리즘에 빠진 수원의 체질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새 얼굴이 중용됐고 베테랑은 물러났다.

빅버드의 상징과도 같던 수문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이운재는 플레잉 코치 제안도 마다한채 수원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그랑블루도 그의 결정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운재는 지난 겨울 전남 입단식에서 노란 유니폼을 입었다. 공교롭게도 대표팀 골키퍼 유니폼 색깔과 같았기 때문일까,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수원팬들의 생각은 달랐겠지만.

◇ 이운재와 그랑블루의 애틋한 재회

반년의 시간이 흐른 2011년 5월 7일. 그랑블루는 돌아온 '레전드'를 위해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경기 시작 전 수원에서 1번을 달고 뛴 이운재의 헌신을 세 번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111초 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구단 역시 이운재가 수원 유니폼을 입고 뛴 32,838분을 기린다는 뜻에서 같은 숫자만큼의 바나나를 관중에게 나눠주었다. 빅버드는 그보다 많은 숫자인 38,038명의 대관중으로 가득 찼다

[사진=수원삼성블루윙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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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뛰어넘는 환대에 이운재의 마음은 뭉클했다.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순간 울컥함을 감추지 못했다. 15년간 뛰어왔던 빅버드. 그가 지난해 대표팀 은퇴경기를 펼친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서둘러 라커룸으로 되돌아갔다. 경기 시작 전에 마음을 추슬러야 했기에….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이탈리아 축구영웅 로베르토 바지오는 1990년 피오렌티나를 떠나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팬들은 구단을 비난했고, 나아가 바지오도 원망스러웠다. 반전은 재회와 함께 찾아왔다. 팀 내 PK 전담 키커였던 그는 유독 피오렌티나전에서 만큼은 페널티킥을 거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정팀 홈팬들의 마음엔 애틋함으로 가득했다.

10년 뒤, 피오렌티나는 이번엔 바티스투타를 AS로마로 떠나보냈다. 은퇴 전 우승을 하고 싶던 그의 열망을 팬들은 이해해주었다. 팀이 한때 2부리그로 떨어졌을 때도 끝까지 남아 팀을 부활시킨 그였기 때문. 이윽고 AS로마의 피오렌티나 원정경기. 바티스투타는 결승골을 뽑아냈지만 그가 달려간 곳은 피오렌티나 서포터즈석이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눈물을 뿌렸다. 팬들 역시 울먹임 섞인 박수로 그를 위로했다.

이운재도 마찬가지였다. 친정 홈팬들의 환호는 고마웠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경기에 들어서자 선방을 이어나갔다. 특히 후반 25분 최성국의 벼락같은 오른발 슈팅을 막아내는 장면은 이날 '선방쇼'의 백미였다. 수원은 이날 17개의 슈팅과 10개의 코너킥을 퍼부었지만 이운재의 벽을 넘지 못했고, 결국 패배했다.

보통의 이운재라면 슈퍼 세이브를 펼친 뒤 특유의 포효하는 세레모니를 보일 법도 했다. 원정경기 대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에 주눅들 법한 동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친정 팬 앞에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미안했다. 차마 그럴 순 없었다. 그랑블루도 조금은 원망스럽게, 그러면서도 '역시 이운재'라는 자랑스러움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사진=전남드래곤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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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 알죠? 나도 알아요…"

경기 후 만난 이운재의 표정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수원에 있을 때는 버스에서 내려 왼쪽을 갔는데 오늘은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어색했다. 라커룸도 홈팀 쪽이 더 좋더라"며 웃어보였다. 묘한 감정의 엇갈림을 들키고 싶지 않았나보다.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수 없다. 어떤 이유로 팀을 떠나게 됐지만 여전히 많은 팬이 나를 사랑해주고, 응원해준다는 것에 대해 머리 숙여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늘은 비록 상대팀에서 뛰었지만 그랑블루에게 최선을 다하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답이라 생각했다"

베테랑다운, 프로다운 대답이었다. 드러내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그랑블루에 대한 애정도 묻어나왔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그는 너스레 섞인 농담을 남기고 빅버드를 떠났다.

"다음 홈경기땐 그랑블루가 저를 향해 야유하겠죠? 그랑블루가 가장 원하는 것은 수원의 승리일 테니까요. 괜찮아요. 다 이해해요. 대신 심한 욕만 안 해줬으면 좋겠어요"



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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