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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알몸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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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길기 때문에 가끔은 모험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모험할 시간은 짧다”. -구글의 최고경영자(CEO) 에릭 슈밋이 한 말입니다. 인생은 길지만 진정 우리가 쓸 시간은 짧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을 우리 학생들은 ‘학창시절은 참으로 지루하기 때문에 가끔은 졸업식에서 모험을 하는 것이 좋다’로 해석했을까요?

요즘 유행(?)하는 ‘알몸 뒤풀이’소동을 보며,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 이 긴 기간 동안 학교에서 대체 어떤 식으로 ‘무엇을 가르쳤기에’ 그럴까 생각해보며, 반면 과연 ‘무엇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변질된 뒤풀이를 하게 될까. 둘 중 하나만 제대로 가르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상영되었던 ‘죽은 시인의 사회’같은 영화나 ‘러브스토리’같은 감성을 자극하는 성인들의 순정영화를 한 편 보여주는 게, 두 시간의 일상적이고 지루한 수업보다 훨씬 더 뭔가를 생각하게 하고 효과적일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내일 또 전국에 눈이 온다고 합니다. 얼마 전 폭설에 파묻혀서 워싱턴 시가지가 마비되고, 연방정부가 휴무에 들어갔던 날, 오바마 대통령이 TV회견에 나와서 웃으면서 했던 말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그는 ‘아마겟돈’이란 재난영화와 스노(눈)를 합성해 ‘스마겟돈’이란 용어를 만들어서 워싱턴이 바로 그런 판국이라며 느긋하고 익살스럽게 말해 긴장한 국민들에게 웃음을 주고 안심시켰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우리 서울시에선 성질 급한 시민들로부터 길거리의 눈을 빨리 안 치운다는 원성에 시달리며 홍역을 치르고 있었죠. 며칠만 더 눈이 왔다면 오세훈 시장이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재선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득 쌓인 눈을 보면서 조만간에, 언젠가는 눈 녹듯이 녹아내릴 그 하이얀 눈 속에서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감성결핍민족들. 다름 아닌 그 자녀들이 지금 알몸뒤풀이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상상을 한번 해 봅니다. 어느 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갑자기 교정에는 종소리가 땡땡~땡땡 울리고 수백 명의 학생들이 책을 덮고 앞다투어 운동장으로 내달립니다. 교내 방송실에선 이 순간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느라 손이 바쁩니다.

팝송이든 가요든 간에 눈을 노래하는 감미로운 음악이 좀 많습니까. 배경음악이 깔리고 눈 내리는 교정에서 10대들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들을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눈 속에 그냥 드러눕기도 하고 눈뭉치를 만들어서 눈싸움을 하고, 서로 뒹굴고 깔깔거리느라 아마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운동장 저 한 구석에는 서너 명이 모여서 아기자기한 눈사람을 만들고, 곳곳에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고 또 찍어주느라고 야단일 겁니다. 혼자서, 둘이서, 아니면 평소에 친한 짝들을 찾아서 그야말로 삼삼오오 사진촬영파티가 한동안 벌어질 것입니다. 운동도 하고 우정도 싹트고 협동심도 기르며 추억도 쌓이는 살아있는 교육현장이죠.

이때 음악소리가 줄어들고 어느 인기 짱 선생님의 목소리가 방송을 탑니다. “지금부터 딱 30분 동안 가까운 친구끼리 7명을 한 조로 해서 눈사람을 만드는데, 가장 예쁜 눈사람을 만드는 팀과 가장 큰 눈사람을 만드는 팀에 특별한 상을 주겠다.”

그날 그 학교 교정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다양한 눈사람이 만들어졌습니다. 어찌 그날뿐 일까요. 다음 날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이 다시 자신들이 어제 만들었던 눈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때론 간밤에 잘 잤느냐면서 다가가서 안고 사진을 찍기도 하겠죠. 그런 장면들이야말로 졸업앨범에서 가장 좋은 사진입니다.

어찌 학생들만 즐거울까요. 새벽이 오고 저녁이 되면 동네주민들이 조깅을 나왔다가 다들 흐뭇한 미소로 운동장을 돌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날따라 몇 바퀴는 더 돌고 가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중에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수업은 안 시키고 학생들을 전부 운동장에 내몰아서 종일 눈사람만 만들었다고 선생님을 신고하는 학부형도 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떨면서 눈사람 만든다고 감기가 걸린 자녀들로부터 콧물을 훌쩍거리며 머리 아프다고 투정부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눈언저리를 눈뭉치에 맞아 병원을 들렀다가 안대를 하고 등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운동장에서 벌어졌던 생생한 한겨울의 이벤트를 동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 동영상사이트에 올리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려서 교장선생님을 고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앞으로 절대 수업시간에 눈사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공문이 교육청에서 각 학교로 발송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 발 빠른 방송사는 그날 저녁 메인뉴스로 그 화면을 내보낼 수도 있겠죠. 그런 게 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라 생각해 이해하고 공감하며 지나쳐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울의 대부분 산 위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있습니다. 승용차로 서울을 30분만 벗어나도 논밭과 온 산에 눈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사람 하나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등산길에 행여 어디에 있나 일부러 찾아보다가 산 위에서 우연히 단 한 개의 눈사람을 보았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언제부터 이처럼 메마른 감성을 갖게 되었는지···.

항공기 테러의 위협 때문에 세계적인 공항에는 ‘알몸 투시기’ 설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부 국가에는 사회단체에서 인권침해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지만, 생명침해라는 보다 심각한 기준에 투시기를 설치하는 공항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어른들은 이렇게 알몸투시도 하고, 24시간 야한 동영상도 맘대로 보는데 까짓 애들이 잠깐 벗었다고 뭐가 잘못되었냐고 항변하는 졸업생도 있을지 모릅니다. 경찰이 졸업식장에 배치되고 이런 문제에 직접 개입해야 되는 교육현장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는지요. 교복을 벗어던진 청소년들이 탈선부터 체험을 하는 이유가 인성교육과 감성교육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요.

방송사의 아침 인터뷰에서 “올해는 눈만 봐도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건조한 서울시민들의 표정을 보며 불현듯 이런 터무니 있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눈이 내리면 한번 찾아보시죠. 눈을 씻고 봐도 없을 겁니다. 눈사람도, 눈사람을 만드는 벗은 애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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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우 시사평론가 pdik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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