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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7장 총소리(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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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7장 총소리(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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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노인, 그러나 일찍이 악명 높았던 아우츠비츠의 수용소장을 지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안나 하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결코 악의 화신도 아니었고, 일부러 악을 저지르기 위해 위악적인 행위를 하는 그런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데 각별히 근면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선량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드라마의 주인공도 물론 아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심문하는 독일계 유태인 앞에서 어떻게 자기가 친위대 중령 밖에 오르지 못했고, 또 자기가 진급하지 못한 것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장장 사개월 동안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아이히만 뿐이겠는가. 대한민국에도 고문 기술자 이근안 같은 이가 있다. 나중에 목사까지 되었다 쫒겨난 그 역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은 애국자이며 자신이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그 일을 똑같이 했으리라고 강변했다. 하긴 맞는 말일는지 모른다. 나찌든 파쇼든 독재는 그런 무뇌의, 반성없는 인간 기계를 무수히 만들어낸다. 평범한 일상 속에 깃든 악마들을....
악마가 무섭고 두려운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하림은 간신히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개의 사체라도 불쑥 나타날 것 같아 가끔 혼자 소스라쳐 놀랐다. 아까 사내가 무겁게 질질 끌고 가던 것은 죽은 개의 사체가 분명했다. 길게 늘어진 모양이 제법 큰개였던 것 같았다. 하림은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짐승의 사체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짐승이라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희미한 빛에 싸인 저수지 옆 둑길을 따라가는 하림의 가슴엔 여전히 수수께끼 하나가 무거운 닻처럼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가 왜....?’
펌프 고치러 왔던 사내는 그날 이장 운학의 전화를 받고 읍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그러니까 그는 읍에서 가게를 하고, 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읍은 이곳 살구골에서 십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날 윤여사랑 전화를 하고, 이장과 이야기 하는 내용으로 봐선 그 역시 이 살구골을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엽총으로 개를 쏘아죽일 까닭이야 없지 않은가. 그리고 죽은 개를 끌고 영감과 딸이 사는 이층집 울타리 부근에 버려두고 갈 까닭은 더더구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유없는 행위란 없다. 하던 행동으로 봐선 무척 당돌했고, 거침이 없어 보였는데 그건 그곳에 분명히 하림 자기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꼬리가 잡히지 않은 의문에 의문을 더하며 어둠을 등진 채, 하림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화실로 돌아왔다. 아직도 가슴은 뛰고 있었고, 온몸까지 어슬어슬 떨리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하림은 배가 고팠다. 그리고보니 점심부터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배는 고팠지만 입안이 바늘이라도 돋은 것처럼 꺼칠했다. 하림은 저녁 대신 아까 소연이 갖다 놓고 간 빵과 우유를 꺼내어 식탁에 놓고 먹기 시작했다. 불도 켜지 않았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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