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XSW에 온 것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2016년 봄의 필자는 도깨비였다. 덜컥 런칭파티부터 열고 <걸스로봇>을 시작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석 달여를 검토하던 한 오프라인 미디어에 대한투자계획을 접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 와중에 오바마 대통령 부부가 SXSW에 참석한다는 공식 발표가 났다. 행사 전날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었다.
현장에서 로봇계의 구루 로드니 브룩스 ‘리씽크로보틱스’ 회장과 소셜로봇 ‘지보’를 만든 신시아 브리질 미국 MIT대 교수, ‘유튜브’ 창업자 스티븐 첸 회장을 만난 것은, 그런 자잘한 불운들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는 행운이었다. 멀찍이서나마 전 미국 영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의 ‘렛 걸스 런(소녀들에게 공부를)’ 캠페인 강연을 들으며, 소명의식이 폭발하는 걸 느꼈다. 이공계 여성들을 돕는 걸스로봇의 길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뭐든 한 번 해보면 그 다음엔 좀 낫다. 올해는 오스틴 버그스트롬 공항까지 가는 미국 항공사를 골랐다. 사전 예약한 기내 인터넷이 꼬여 일을 못한 것만 빼면 완벽했다. 호텔도 만족스러웠다. 중심가에서 20여분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조용하고 깨끗했다. 무엇보다 호텔 전체에서 ‘아쿠아 디 팔마’의 고급스런 향기가 났다.
진짜 달라진 건 내 마음이었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해졌다. 여성, 그리고 로봇. 두 가지 키워드는 내게 나침반과 지도가 돼 주었다.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영어를 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사라졌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의 문제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SXSW의 본질은 혼돈 그 자체였던 것. 다 가질 수 없고 다 볼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시간은 흘러간다. 놀든 자든 배우든 행동하든 그 시간을 쓰는 건 오롯이 나 자신이다. 나침반이 있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 지도가 있으면 잃은 길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실은 길을 잃고 헤매고 다시 찾는 그 과정이 바로 삶이다. 그걸 깨달으려고 머나먼 사우스웨스트에서 나는, 비타민 폭탄을 먹고 덜덜 떨며 강연장을 돌고 있나 보다.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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