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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눈 먼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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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씌어진 시’ 중에서)

‘그때 그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참회록’ 중)
시인 윤동주가 27년여 짧은 생애에서 부여잡고 살았던 화두 중 하나는 ‘부끄러움’이었나보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어쩌면 부끄러움은 순수의 표상이다. 정지용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서 윤동주의 동생 일주씨와의 문답을 전했다. 그 문답에서 윤동주는, 하도 말이 없어서 무슨 ‘연애’가 있었는 지 알 수 없으며 누가 달라면 책이냐 ‘샤쓰’를 거저 주는 사람이었다. 술을 먹는 것은 보기 힘들었고 심술 없이 ‘순하디 순’했다. 그는 일본 유학 중 민족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가 그 곳에서 숨을 거뒀다.

맹자는 ‘부도덕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타인의 악행에 분노를 느끼는 마음’, 즉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인간의 본질 중 하나로 봤다. 맹자의 세계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 부도덕한 행동은 대개 타인의 아픔을 수반하기 마련인데, 이에 대한 공감이 바로 부끄러움에서 시작한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곳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2010년 타계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나서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간의 울렁거리는 밑바닥을 훑어버린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죄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격리된 수용소에는 배설물이 쌓이고, 사람들은 그보다 딱히 나을 것 없는 짐승(혹은 괴물)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존욕과 식욕, 성욕만이 모든 것을 짓이겨버린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들은 소수다.

인간을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을 만드는 회사의 회장이 ‘내 차 안’에서 내뱉은 말들은 오히려 인간을 파괴시키기에 충분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쏟아져 나올 수 없는 입 안의 흉기들이었다.

어쨌거나 세상은 겉으로는 상식과 도덕의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시선이 차단되는 곳,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 곳에서는 여전히 야만이 용틀임하고 있다.

어디 그 회장님의 자가용 안 뿐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 패악이 일상처럼 일어나 지금 이 순간도 낮은 곳의 영혼들을 기생충처럼 갉아먹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아들 혹은 딸이다. ‘갑질’이란 표현은, 죄질에 비해보면 지나치게 점잖거나 무심해 보일 정도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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