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참회록’ 중)
어쩌면 부끄러움은 순수의 표상이다. 정지용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서 윤동주의 동생 일주씨와의 문답을 전했다. 그 문답에서 윤동주는, 하도 말이 없어서 무슨 ‘연애’가 있었는 지 알 수 없으며 누가 달라면 책이냐 ‘샤쓰’를 거저 주는 사람이었다. 술을 먹는 것은 보기 힘들었고 심술 없이 ‘순하디 순’했다. 그는 일본 유학 중 민족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가 그 곳에서 숨을 거뒀다.
맹자는 ‘부도덕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타인의 악행에 분노를 느끼는 마음’, 즉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인간의 본질 중 하나로 봤다. 맹자의 세계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 부도덕한 행동은 대개 타인의 아픔을 수반하기 마련인데, 이에 대한 공감이 바로 부끄러움에서 시작한다.
인간을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을 만드는 회사의 회장이 ‘내 차 안’에서 내뱉은 말들은 오히려 인간을 파괴시키기에 충분했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쏟아져 나올 수 없는 입 안의 흉기들이었다.
어쨌거나 세상은 겉으로는 상식과 도덕의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시선이 차단되는 곳,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 곳에서는 여전히 야만이 용틀임하고 있다.
어디 그 회장님의 자가용 안 뿐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 패악이 일상처럼 일어나 지금 이 순간도 낮은 곳의 영혼들을 기생충처럼 갉아먹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아들 혹은 딸이다. ‘갑질’이란 표현은, 죄질에 비해보면 지나치게 점잖거나 무심해 보일 정도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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