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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괴물과 신사와 인간의 사이

최종수정 2018.03.09 15:13 기사입력 2018.03.0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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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영화나 만화에서 괴물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괴물은 신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애로운 아버지, 다감한 남편, 능력 있는 상사, 인자한 스승,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성추행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좋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으로 불린다. 검찰, 문단, 예술계, 회사나 조직에서 권력을 이용하여 성추행과 성폭행을 일삼은 사람들도 같은 인간인 남자 동료에게는 멋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뉴스의 문화초대석에 초대된 한 명민한 배우는 '#미투'운동을 '기적'이라고 했다. 그만큼 드러나기가 쉽지 않았던 사건들이고 이 운동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 또한 지대하다는 뜻일 터. 바야흐로 절대 깨질 것 같지 않게 두껍게 얼었던 얼음이 깨지는 해빙기다. 그나마 연극계에서 먼저 시작한 이 운동을 두고 혹자는 연극계가 유난히 썩은 곳인가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연극계가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나마 고발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아직 깨지지 않은 얼음 아래 다른 영역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성적 유린이 있어왔는지 감히 다 알지 못한다.

괴물은 신사의 얼굴을 한다. 한 사람 안에 깃든 엄청난 괴리를 가진 두 인격체는 우리 안의 여러 모습을 보게 한다. 그 괴물이자 신사인, 하지만 미처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너그러운 신사는 권력을 갖고 있기에 자유롭고 활달하고 분방하다. 그 분방함을 여성에 대한 성적 유린으로 푼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기에 막 다루어도 된다 생각하여 권력을 앞세워 마음껏 농락한다.

우리 사회가 괴물과 신사라는 두 얼굴의 무서운 존재를 이렇듯 무성하게 키워온 이유는 권력 앞에서는 모든 게 쉽게 용인되는 사회의 관성, 또 권력 앞에 조아리는 수직적인 문화 탓이 크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미투'의 고발은 신사의 얼굴 안에 도사린 괴물을 응시하게 했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언론의 선정적인 일회성 보도의 희생양이 되어선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용기에 힘입은 고발 이후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미투'와 '#위드미'가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연대를 통한 여성 정책의 구체적인 변화, 교육의 장에까지 인권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끌어내야 한다.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가 "한국의 기술, 정보의 진보와 견주어 여성의 권리가 낙후되어 있다"고 비판한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이 적극적인 정책 의지로 극복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의 열렬한 관심 후에 발본적인 대책이 수립되지 않고 흐지부지된다면 용기 낸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2차 가해가 너무 쉽게 예상된다. 가령 피해자들을 상대로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권력자를 돕는 방향으로 적용되어 온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폐지부터 필요하다.
강간죄를 포함, 피해자가 모든 걸 증명해야 하는 성폭력의 법적 적용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의 구체적인 차별금지법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하는 실질적인 행정과 법 조항의 개선,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인권 교육이 절실하다.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여성은 이제야 주체적 개인으로 서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법과 행정, 교육의 변화를 통한 성 평등의 실현은 우리 사회의 필수 과제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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