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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56]지리산 둘레길에서

최종수정 2017.08.30 15:46 기사입력 2017.08.30 15:24

윤제림 시인
해도 뜨기 전에 숙소를 나섰지만, 길은 처음부터 꼬였습니다. 푯말을 잘못보고 산길을 헤맨 탓에 족히 두어 시간은 허비했습니다. 물론 급할 것 없는 산행이니, 시간 좀 까먹은 것이야 별일 아니지요. 숨이 턱에 닿을 만큼 된 비탈을, 힘겹게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기력을 다 쏟은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 기운으로 이 땡볕 속을 어찌 가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산길 사십 리입니다. 금세 자신이 없어집니다. 딴 생각도 일어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음으로 미룰까. 오랜만에 화엄사 구경이나 하고 그냥 돌아갈까. 공연히 만용을 부리다가 더위라도 먹고 쓰러지면 더 한심한 일 아닌가."

 그러나, 용케 생각을 다잡았습니다. 화개장터까지 일곱 시간을 걸었던 어제를 생각했지요. 오늘은 경상도를 벗어나 보기로 합니다. 언뜻언뜻 몸을 내보이는 섬진강 물빛이 힘이 될 것입니다. '남원'에서 시작한 도보순례길. '함양, 산청' 거쳐, 이제 '하동 넘어 구례'! 한 번에 사나흘씩 서너 차례, 몇 해를 이어온 여정입니다.

 '지리산 둘레길'은 3도(道), 5개 군(郡), 16면(面)을 밟고 돕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둘레길'이란 표현이, 좀 못마땅합니다. 해발 천 미터를 넘어가기도 하는 길 이름으론 너무 점잖기만 하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럼 무어라면 좋겠느냐는 '둘레길 안내센터' 담당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지리산 허리길 혹은 굽잇길!"

 사실입니다. 지리산 둘레길은 휘파람 불며, 콧노래 흥얼대며 걷긴 어렵지요. 키는 한라산보다 두 뼘쯤 작지만, 덩치는 세 배나 큰 산. 천 사백 미터가 넘는 봉우리만도 이십여 개나 되는 산. 동서남북으로 수 백리를 치고 달리는 산. 누군가 작심하고 숨어들면 석 달 열흘은 찾아다녀야 하는 산.
 '택리지(擇里志)'에 나오는 말을 곧이듣자면, 일만 육천 개의 봉우리를 거느린 산. 그 열배 백배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산. 온갖 열매와 나물과 약재를 감추고 파묻었다가 철따라 꺼내주는 산. 차나무를 키우고, 고사리를 기르는 사람들 그 장승같고 돌미륵처럼 평화로운 낯빛도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산.

 '굽이굽이 허리 굽혀 절하는' 마음으로 따라 돌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등산과 유람의 산길이 아니라, 피어린 노동과 땀 젖은 생업의 길인 까닭입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사시던 덕산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이 고장 고갯길은 '곶감 팔러 다니던 길'이라고. 골골이 감나무 천지, 집집이 곶감이 널리는 마을이었습니다.

 곶감 지게라고 더 가벼울 리 없겠지요. 술과 숯과 소금과 장작과 곶감이 평등했을 것입니다. 혓바닥은 덥석 반기는 물건이지만, 등허리가 단맛을 알 바 없지요. 놀부를 지고 넘든, 춘향을 안고 넘든 힘들기야 매일반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 배낭무게를 그 옛날 지게 위의 곶감 상자 혹은 등짐 봇짐과 견주어 봅니다.

 이런 안내판이 자주 눈에 띕니다. "길을 허락해주신 마을 주민께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부탁입니다. 인적보다 짐승의 흔적이 더 흔한 골짜기에 사람의 길을 열어낸 이들이 누굽니까. 맨손으로 일구고 온몸으로 다진 밭머리 논두렁이 누구 땅입니까. 저는 지금 그런 이들의 길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성부 시인의 시가 감사와 공경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지금 조릿대 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여행의 감동과 보람을 표현하는 대부분의 말과 글은, 길과 풍광을 제공한 자에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이제 몇 구간 남지 않은 제 둘레길도 새삼 그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높은 데까지 호미를 들고 올라온 이들이 있었구나." "함께 가지 않으면 참으로 외롭고 무서운 길이었겠구나."

 지리산의 문장과 무늬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까닭을 알았습니다. 그것들은 대개, 온종일 사람 두엇 겨우 지나는 길에 감춰져 있습니다. 어떤 탈것도 오를 수 없는 높다란 벼랑이나 사나운 비탈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고 지고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한발 한발 맨발로 써놓은 책이라 그렇습니다.

 위의 시('산길에서'-내가 걷는 백두대간 22) 후반부가 그 이치를 알게 합니다. '지리산'이 얼마나 위대한 경전(經典)인지를 알려줍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씌어졌는지 일러줍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 이름도 밝히지 않고, 쌓아두고 간 시(詩)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길 따라 그이들을 따라 오르는 일/이리 힘들고 어려워도/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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