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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역린(逆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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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상도 정치부 차장] 역린(逆鱗). '거꾸로 박힌 비늘'이란 뜻의 이 고사성어는 임금의 분노를 가리킨다. 전국시대 한나라의 한비가 쓴 '한비자(韓非子)'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용의 턱 밑에 길이가 한 자나 되는 역린이 있으니 용을 길들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건드리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후 임금에 대한 경외와 기피심을 표현할 때 이 구절이 즐겨 인용됐다.

2014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는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를 다룬다. 정조를 암살하려는 노론세력과 역모의 낌새를 눈치 챈 군주, 그의 엄호세력 간에 숨 가쁘게 돌아간 하루를 풀어냈다.

영화는 단순히 선악 구도가 아니다. 왕은 정적인 분위기로 점철돼 있다. 우직한 무게감이 때론 거북할 정도다. 이런 정조가 상책(내시부의 종사품 벼슬)에게 묻는다.
"그 때의 너는 무엇이었느냐."

이 대사는 영화를 관통한다. 적폐세력과 마주한 정조의 난감한 현실을 축약하고 있다. 왕은 자신을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노론세력을 단칼에 걷어내고 싶지만 힘이 없다. 유일한 무기는 백성(국민)을 향한 진정성이다. 그를 향해 그릇된 세력은 이렇게 말한다.

"나 하나 죽여 봐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는 반대세력이 차례차례 왕의 편으로 돌아서는 '변화'가 일어나면서 왕의 승리로 귀결된다. 이는 올바른 지도자의 승리로 치환되며, 세상을 위한 더 나은 정치가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를 설파한다.

불과 3년 뒤 대한민국. 탄핵 정국을 거친 현실 정치는 이 영화를 꼭 빼닮은 듯하다. 적어도 친노ㆍ친문 진영에겐 그렇다. 선출직 최고 지도자가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에선 왕과 진배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의 극적 전개는 무난하다. 뒤틀린 적폐를 바로잡겠다는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재인 정부를 상징하는 여당의원 20여명과 친노ㆍ친문인사들이 23일 새벽 의정부교도소 앞에 집결했다. 이들 주위에는 노란 풍선이 만발했다. 이들이 기다린 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한명숙 전 총리였다. 그의 입에선 "드디어 새 세상을 만났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친노 진영이 자신들이야말로 절대선이라고 믿던 바로 그 때를 떠올렸다. '친노 대모'의 귀환을 우려하는 건 기우에 불과할까. 살벌한 복수극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은 아닐까. 영화 속 정조는 역설적으로 역린을 드러내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해 최선을 다한다'는 중용의 구절을 되뇌였을 뿐이다.



오상도 정치부 차장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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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도 기자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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