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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 ‘레이트어답터’의 포케몬고 2박 3일

최종수정 2017.01.31 12:07 기사입력 2017.01.3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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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얼리어답터’들은 벌써 지난해 여름 영접을 마치고 놓아버린 ‘한 물 간’ 게임이 한반도에 공식상륙한 건 일주일 전이었다. ‘포케몬고’ 얘기다. ‘트렌드에 민감하지만,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다’는 모순된 기준의 소유자로서, 처음 며칠은 무시했다. 아이폰용량은 많지 않고, 일이란 모자란 법이 없었다. “미국에서 유행하던 프랜차이즈가 뒤늦게 상륙한 것 같아 촌스럽다”는 누군가의 일갈이 위로가 됐다. 게다가 한겨울에 웬 사냥.
필자는 중독에 취약한 체질이다. 육신이든 정신이든 중독되겠다 싶은 건 사전에 알아서 피하곤 했다. 술도 담배도, 만화도 게임도, 당연히 마약도 섹스도. 그 와중에 덜 위험해 보이는 피규어 수집에 몰두하며 한 재산 탕진하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건전덕후였다.
하지만 나의 순박한 SNS 친구들은 레벨 자랑을 시작했다. 체육관, 부화, CP, XP… 잘 알아듣지 못하는 가상세계의 말들이 현실세계로 섞여 들면서, 닷새 만에 마음이 흔들렸다. 스스로에게 중독을 허하는 데는 면죄부가 필요했다. 마침 써야 할 칼럼이 있었고, 그 소재로 때늦은 포케몬고 열풍은 괜찮아 보였다. 마감 이틀 전 오후 7시, 용량을 차지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구글에 올리고, 빈 자리에 앱을 깔았다. 그리고 이틀째인 마감날 아침, 나는 레벨 12에 포케몬 255마리를 수집한, 수면부족 좀비플레이어가 됐다. 마감을 이미 하루 어겼다는 사실은 당일 아침에야 알았다.

방구석 플레이어
첫날은 새벽 다섯 시까지 잠을 못잤다. 운동부족 히키코모리들을 밖으로 끌어내겠다는게임의 기획의도와 달리,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실내에서 달밤에 체조를 하기는 했다. 100미터 운동장 없는 학교에서 대각선으로 달리기하듯 나는 거실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실내계단으로 일이 층을 오르내리며, 팔다리도 열심히 저었다. 미밴드도애플워치도커브스도 못한 그 어려운 일을, 포케몬 고가 해내고 있었다. 피카츄 데리고 사냥다니듯 현실에선 왕관앵무‘뾱뾱이’가 밤새 나와 함께 날았다. 누군가 CCTV로 나를 지켜봤다면, 정신 나간 아줌마라고 했으리라.
가상세계의 트레이너 ‘레이디로보타’는 현실의 나와 비슷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빨간색매니아이자 향수 덕후, 그리고 피규어 수집광. 현실세계에서는 자주 입지 못하는 빨간 재킷에 빨간 숏팬츠를 입고, 빨간 모자에 빨간 신발까지 갖춘이 사냥꾼이 썩 마음에 들었다. 레이디 로보타는 향로만 피워서 하룻밤새 포케몬 30마리를 잡고 레벨 11이 됐다. 다음날 아침, 퀭한 눈으로 자랑하는 에미를, 중딩 큰아들놈이 비웃기는 했지만.

올레보다 포케몬
매뉴얼 같은 건 있어도 잘 읽지 않는 행동파이긴 했지만, 둘쨋날엔 결국 포케몬 고 지도를 깔았다. 제주 지역 트레이너들이 남긴 블로그도 읽었다. 아무 후기가 없는 중문을 골랐다. 점심 먹고 시작해 저녁 여덟 시가 되도록 걷고 뛰고 달렸다. 올레길 한 번 제대로 밟지 못한 내가 어지간한 관광지도를 꿰뚫게 됐다.
눈발이 섞인 바람이 불었다. 곱은 손으로 잡아들인 포케몬은 255마리, 그 중엔 ‘피카츄’도 두 마리나 있었다. 레벨이 높지는 않지만 주인공 아닌가. “피카츄라이츄 파이리 꼬부기~” 어느새 옛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두 아이들이 부르는 요즘 노래와는 달랐다. 돌아오는 길, 나처럼 ‘쪼렙(낮은 레벨)’이 점령한 체육관에 들러내 포케몬을 박아놓기도 했다. 마침 해당 체육관의 이름은 ‘헬로키티 박물관’. 취향에 딱 맞았다.
둘쨋날 밤에는 새벽 두 시까지 유튜브튜토리얼을 봤다. 얼리 어답터들이나 하는 편법도 써 봤다. 위치를 조작해 주는 ‘페이크 GPS’를 사서, 아까 그 포케몬 성지의 주소를 넣어본 것.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고백하자면, 돌아올 때쯤 마음이 급해 ‘현질(현금으로 아이템을 사는 것)’까지 했다. 이럴 바에야 시작할 때 싸들고 들어가 초토화시키는 건데, 나는 어느새 그런 후회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잔영이 남았다. 머릿속으로 몬스터볼을 던지다 잠이 들었다. 이 작은 포케몬이 어느새 일상을 지배해버린 것. 포켓에 사로잡힌 건 몬스터인가, 나인가. 21세기 한복판에서 나는, 기원전 200~300년대 장자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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