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Dx란 그런 TED의 정신을, 더 많은 곳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이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라이선스 강연이다. 필자를 초대한 ‘TEDx신촌’은 국내 30여 개 라이선스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곳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임기응변에 기대려던 계획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사전 대본 점검에서 두 차례나 ‘퇴짜’를 맞았다. 한 번은 유머코드에 치중해 너무 지엽적이라고 했고, 다른 한 번은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다고 했다. 아프지만 사실이었다. 제한시간은 18분, 그 시간을 다 쓰면 청중들이 지루해하기 쉬웠다. 13분에서 14분 사이, 임팩트 있는 메시지를 꼭 하나만 전달해야 했다.
변명만 하다 일주일이 흘렀다. 원점으로 돌아가, 대본이 왜 안 되는지 생각해 봤다. 나는 멋있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걸스로봇>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얼마나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무명(無名)은 자리를 골라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주역을 노려 설쳐서도 안 된다. 그런데 나는 얼결에 올라간 큰 무대에서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기교를 부렸고, 글이 엉켰던 게다. 전문가들의 사교클럽을 지금의 TED로 만든 크리스 앤더슨은 말했다. “가장 강력한 지식은 자신을 여는 데서 나온다”. 나는 나를 좀 더 열어 보이기로 했다. 걸스로봇이 이룬 쥐꼬리 같은 성취를 부풀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된 실패를 고백하는 형태로 말이다. 걸스로봇의 본질은 ‘잘 나가는 여자들의 세력화’가 아니었다. ‘좌절된 여자들의 연대’였다.
행사 사흘 전, 마침내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스태프들은 프롬프터 자막을 준비했다. 하루 전, 둘째를 데리고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밤 9시, 친정엄마께 아이를 맡기고 PPT를 손질하는데 전화가 왔다. 謀:9 비율이 제일 예뻐요.”그들은 진정한 프로들이었다.
행사 당일, 오전 8시에 현장에 도착했다. 기술 리허설에 이어 무대 리허설을 두 번 돌려봤다. 마침내 오 분 전, 대기실에 마련된 가글액을 뱉어내고 무대에 올랐다. 두 번이나 연습을 했는데도, 말이 엉켰다.
조명 너머로 300여 명의 청중들이 보였다. 그들 중 단 1퍼센트의 마음만 움직여도 성공일 터였다. 준비한 시간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무대 뒤에 있던 스태프들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아, 망치지는 않았구나.’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한국의 TEDx는 명동이나 신촌과 같은 곳에서, 대학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주축은 20-30대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경제적 보상도 없는 일에 몇 달을 쏟아 붓는다. 때론 자비를 털어 넣기도 한다. 퍼뜨릴 가치가 있는 생각을 발굴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고, 누군가의 열정은 다른 누군가에게 전염돼 세상을 바꾸리라 믿는다.
유행에 열광하는 풍토 때문이라거나 스펙을 쌓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이 일을 한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TEDx는 TED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실천적 운동이었다.
프로정신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놓은 두 번의 퇴짜는, 나를 각성시켰다. 본질을 잊는 순간, 운동은 실패한다. 일시적 인기에 취하는 순간, 사업은 무너진다. 내겐 그걸로도 충분했다.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