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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민초를 생각하며 퇴계가 울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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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51)
[千日野話]민초를 생각하며 퇴계가 울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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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麾出守愧疎? 民困當春意自?(일휘출수괴소용 민곤당춘의자충)
去傍紫崖殘雪外 歸吟斜景亂山中(거방자애잔설외 귀음사경난산중)
陽噓草茁人還羨 天放鷗閒我未同(양허초줄인환선 천방구한아미동)
十室不堪星在? 絃歌那得變謠風(십실불감성재유 현가나득변요풍)
이 시는 퇴계가 남긴 시편 중에서 스스로의 무능을 통탄하는 가장 격렬한 자기반성이 담겨 있다. 곤궁한 백성들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득 녹아 있다. 단양군수 퇴계 이황은 목민(牧民)의 어려움에 이토록 괴로워했다.

백성의 딱한 상황을 알면서도 그는 어떻게 이들을 구제해야 할지 방안이 서지 않아, 고을의 바깥에 순시를 나섰다가 산중까지 헤매며 저녁에야 돌아온다. 굶주린 민초들은 어떠했는가. 봄을 맞아 풀들이 돋는 것을 보고, 저것들은 그래도 마음껏 햇살을 받아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하고 부러워 한다. 풀싹을 살리는 봄 햇살의 정치만큼도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딱하고 답답하다. 하늘과 자연은 짐승과 초목을 풀어놓고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군수로 목민을 해야 하는 나는 대체 왜 그들을 살리지 못하는가.

'열 집이 통발에 별들만 잡힌 것(굶주림을 의미한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시 구절은 시경(詩經)의 구절 '三星在? 人可以食 鮮可以飽(삼성재유 인가이식 선가이포ㆍ별 세 개만 통발에 잡혔네 사람은 먹어야 하는데 배불리 먹는 이가 드물구나)'에서 인용한 것이다.
퇴계는 자신이 이렇게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한다. 관리가 되어 한탄 섞은 노래를 부른다 한들, 저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민초들에게서 격양가(요나라 때 땅을 치며 백성들이 풍년을 노래하던 것)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정치적인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깊이 자탄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는 단양 북서부의 매포(買浦ㆍ현재는 梅浦라고 부른다)의 구휼창고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말 위에서 읊은 시였다.

사뭇 비장하고 통렬한 자기고백의 시에 공서가 깜짝 놀란다.

"사또. 어찌 이토록 스스로를 괴롭히고 계십니까?"

그때 퇴계의 얼굴이 몹시 굳어지더니 눈물을 주루룩 흘린다.

"제가 군수로 와서 몇 달간 백성들의 사정을 살펴보니, 곤궁이 극에 이르러 그 참상을 이루 말할 수 없더이다."

"전해 듣는 말로 듣긴 하였지만, 실상은 어떠하였습니까?"

퇴계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금 침묵한 다음 말을 꺼낸다.

"이곳은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쪽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는 지세입니다. 잡초가 우거지고 바위가 험해서 마을의 집들은 대개 나무껍질을 벗겨 기와 대신 쓰고 있으며 띠풀을 엮어서 벽을 가리고 있습니다. 밭이 있기는 하나 워낙 척박하여 가뭄이면 한재가 들고 홍수 때는 수재가 들어, 소출이 일정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저런…." 공서가 혀를 찼다. 퇴계의 말이 이어진다.

"이곳은 원래 독립된 고을이 아니었고 원주의 부속 마을이었는데, 험지(險地)를 이용해 침략하는 적을 막아낸 공로가 있어 군으로 승격하였지요. 부역에 나설 수 있는 집은 60집이 채 되지 않습니다. 경지 면적은 500결을 만들기도 부족하여 풍년이 든다 해도 백성의 절반은 콩으로 연명하고 있고 흉년이 되면 도토리를 줍기에 바쁩니다. 창고에는 곡식 6000석이 쌓여 있지만 그중에는 벼 대신 피가 잔뜩 섞여 있습니다. 물론 피 또한 구황작물로 백성들은 이것도 없어서 못 먹습니다. 백성으로부터 받아야 할 곡식 중에서 받지 못한 공물(포부(逋負)라고 한다)이 절반이 있지만, 이미 주린 그들에게서 받아낼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적다 보니 한 집이 오십 호의 부역을 감당해야 하고 한 장정이 오십 사람의 일을 맡아야 하니, 나랏일을 하느라 백성이 제 밭을 가꿀 여력도 없고 시간도 없는 지경입니다. 관사에 공납해야 하는 서까래가 매년 400개가 필요하고 잡목재는 수만개가 필요합니다. 뗏목을 이용해 수운(水運)을 하는데, 60집에서 저 나무들을 베고 다듬고 운반해야 하니 남녀노소가 다 달라붙어도 어림 없습니다. 소와 말도 그 일을 하다가 대부분 죽어 온 농가의 가축이 백 마리도 되지 않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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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거시기를 저시기하고…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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