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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방랑벽…80만원에 얻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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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정상근씨 인터뷰

[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사주에 '역마살(驛馬煞)'이라는 게 있다. '늘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 액운(厄運)'이란 의미다. '액운'이 나쁜 뜻이니 역마살도 결코 반가운 기운은 아니다. 하지만 뭐든 활용하기 나름이다. 역마살처럼 불행한 운수도 좋은 주인을 만나 알차게 활용된다면 얼마든지 '행운'으로 거듭날 수 있다.

15일 만난 정상근(27·사진)씨는 역마살을 타고났다. 중학교 1학년이던 지난 1997년, 자칭 '온실의 화초'였던 정씨는 비상금 4만원을 들고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 등 남도 여행을 혼자서 6일 간 다녀왔다.

"교과서에서 얼핏 본 땅끝마을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냥 그 뿐입니다. 역마살이 발동했다고 봐도 되겠죠.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막막하더라고요. '세상과 사람을 믿어보라'는 부모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청소년 여행가'가 된 정씨는 언론 조명을 받았다. 신문과 방송에 잇따라 출연했고, 인터뷰도 수 십차례 했다. 호기심에 감행한 여행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떠남'에 익숙해 진 것이다. 방학을 그냥 보내지 않고 어디로든 떠났다.

"방학만 되면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어요.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 때 '시설이 열악한 곳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 한 것을 계기로 지방 양계장에서 2주 동안 일 한 적도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동학농민운동지 답사 무전여행을 떠났는데, 한 방송사 제안으로 학교 후배들과 함께 이동하며 '로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요"

여행을 기다리다 결국 떠나고 돌아와서는 다시 다음 여행을 기다리며 보낸 청소년기. 대학입시와 군복무로 잠시 '휴식'을 가졌지만 역마살이 수그러들진 않았다. 휴식기 동안 정씨는 해외를 그렸고, 관심 가는 나라에 관한 책을 읽으며 계획을 구체화 했다. 제대 직후인 2006년 7월, 그는 마침내 호주로 출발했다. 단돈 80만원만 지닌 채였다.

"세계여행이라고 하면 거창한 계획과 커다란 돈뭉치를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여행은 돈이 차고 넘쳐야, 영어가 유창해야, 혹은 시간이 남아 돌아야만 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행을 이끄는 건, 90%의 열정과 10%의 부수적인 그 무엇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모든 걸 비우고 떠나야 더 많은 걸 담아올 수 있을 겁니다"

호주에서 '투 잡(Two-job)', 때론 '쓰리 잡(Three-job)'으로 약 4개월 동안 독하게 돈을 모은 정씨는 이후 네팔과 인도 등 아시아,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곳곳을 1년 동안 거침없이 누볐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정 원하는 게 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80만원으로 세계여행'이란 책으로 엮었다.

"제가 여행한 곳들은, 한국에서 토익 한 문제 더 풀고 리포트에 매진하며 취업에만 열을 올렸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세상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0대의 1년을 길 위에서 보낸 걸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책이 예상보다 많이 팔려 학생으로선 만지기 힘든 두둑한 돈을 벌게 된 정씨. 그는 오는 2월, 인세 전액을 국제구호단체에 기부한다. 14살 첫 여행 때부터 사람과 세상에게서 받은 관심과 도움에 대한 값을 치르는 셈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3월에는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결국 다시 떠납니다. 국제관계학 공부를 통해 지속가능개발과 환경문제, 인권, 국제 거버넌스(governance) 분야를 접해 볼 작정입니다. 그 다음이요? 아직 잘 모릅니다. 꿈이 있는 한, 계속 달려갈 것 같습니다"

14살 청소년을 끊임없는 여행길로 이끈 역마살은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났고 저 멀리 아프리카 낯모르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건네려 머지않아 스스로 바다를 건넌다. 정씨의 '방랑'엔 이유가 있다. 80만원으로 세계를 샀던 그가 다음 번엔 얼마를 가지고 무엇을 사들일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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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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