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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오타니 쇼헤이와 사무라이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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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미국 메이저리그(MLB)는 두 가지 이야기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텍사스 레인저스가 62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는 사실과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가 만장일치로 MVP로 선정되었다는 사실.


LA 에인절스는 지난 8월16일 텍사스 레인저스와 원정경기를 가졌다. 이날 레인저스 팬들은 ‘글로브 라이프 필드’에서 특별한 글자판 응원을 했다. ‘OHTANI COME TO TEXAS.’

‘오타니, 텍사스로 오라’는 뜻이다.

텍사스 레인저스 홈구장에서 텍사스팬들이 글자판으로 오타니를 응원하고 있다.   [사진 제공= AP연합뉴스]

텍사스 레인저스 홈구장에서 텍사스팬들이 글자판으로 오타니를 응원하고 있다. [사진 제공=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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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는 2023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어느 팀과도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 올 시즌 LA 에인절스의 원정경기에서 오타니가 등장하면 원정팀 팬들은 어김없이 오타니에게 자기 팀으로 와달라는 글자판 응원을 펼치곤 했다.


130년이 넘는 MLB 역사에서 특정 선수에 대해 지역을 불문하고 야구팬들이 자기 지역으로 와달라고 구애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2023년 MLB는 텍사스 우승에 앞서 ‘오타니 현상’으로 기록되었다.


오타니는 일본에서 투타 겸업으로 성공한 뒤 2018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러니까 2023시즌은 MLB 6년 차다. 오타니가 투구를 하다 위기에 몰렸을 때 투수코치가 일본어 통역을 대동하고 마운드로 향한다.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이는 “아니 미국에 산 지 6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영어로 소통을 못 해”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오타니는 영어를 배우는 데 특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MLB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긴 스즈키 이치로(鈴木一郞)를 연상시킨다. 이치로는 일본 프로야구를 거쳐 2001년 MLB에 진출해 18시즌을 뛰었다. 시애틀 매리너스(2회), 뉴욕 양키스, 마이애미 말린스를 거쳤다.


이치로가 맹타를 휘두른 덕분에 ‘아시아에 (MLB에서 주전으로 뛸 만한) 타자는 없다’는 미국인의 편견이 깨졌다. 이치로는 MLB에 진출한 첫해부터 10년간 3할 이상을 기록했다. 2010년 아메리칸리그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타율 0.372에 안타 262개를 기록해 타격상과 최다안타상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이 나왔다.


그는 타석에 들어서면 특별한 습관을 보이곤 했다. 배트를 휘두르다가 오른손으로 배트를 들어 투수 쪽으로 겨눈다. 그리고 유니폼 어깨 부분을 살짝 잡아당긴다. 매서운 눈빛으로 투수를 노려본다. 야구팬들은 이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사무라이를 떠올렸다.

LA 에인절스 홈구장 복도 벽면에 설치된 '이도류' 오타니 쇼헤이. [사진 제공= 조은철]

LA 에인절스 홈구장 복도 벽면에 설치된 '이도류' 오타니 쇼헤이. [사진 제공= 조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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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영예상(國民榮譽賞)'. 일본인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다. 1977년에 제정된 이 상은 ‘널리 국민에게 경애를 받아, 사회에 밝은 희망을 주는 데에 현저한 실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현재까지 27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오타니는 2022년 말 국민영예상에 추천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이 상을 거절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막이 내려갈 때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스즈키 이치로는 세 차례(2001년, 2004년, 2019년) 국민영예상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수상을 사양했다.


오타니는 MLB 진출 첫해인 2018년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2019~2020년 시즌도 비슷했다. 주목은 받았으나 주목받을 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투타 겸업이라는 이도류(二刀流)는 일본에서만 통하는 게 아닌가, 모두가 생각했다.


‘오타니 현상’이 불기 시작된 것은 2021년 4월5일. 오타니는 MLB 진출 이후 처음으로 한 경기에 선발투수와 타자로 나왔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홈경기. 161㎞의 강속구로 삼진을 잡으며 1회초를 무실점으로 넘긴 오타니가 1회말 2번 타자로 타석에 섰다. 에인절스 팬들은 긴장했다. ‘과연 타자 오타니는?’


그는 바람을 가르는 스윙을 했고, 타구 속도 185km가 찍힌 빨랫줄 같은 1점 홈런을 날렸다. 야구 만화책에서나 나오던 이야기가 눈앞에서 벌어졌다. 메이저리그 취재기자들은 경악했다. 이도류가 가능하다니! 이날 에인절스는 7대4로 이겼다. ‘오타니 현상’은 이렇게 LA에서부터 일기 시작했다. 2021년 올스타 게임에서 그는 투수와 타자로 동시에 올스타에 선발됐다.


‘오타니 현상’의 절정은 누구나 아는 대로 2023시즌이다. MLB 뉴스를 톱으로 잘 다루지 않는 신문 스포츠면에서 메이저리그 뉴스가 자주 메인으로 등장했다. 전부 오타니 관련 기사였다. 클라이맥스가 7~8월이었다. 7월28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원정경기. 이날 경기는 더블헤더로 치러졌다. 더블헤더 1차전은 선발로 나서 완봉승을 거뒀다. 완봉승이 얼마나 힘든지는 야구팬들은 다 안다. 더블헤더 2차전에서 지명타자로 나와 2개의 홈런을 쳐 팀에 승리를 안겼다.

LA 에인절스 홈구장 복도 기둥에 장식된 오타니 사진. 그 옆으로 17번 등번호 유니폼을 입은 야구팬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제공= 조은철]

LA 에인절스 홈구장 복도 기둥에 장식된 오타니 사진. 그 옆으로 17번 등번호 유니폼을 입은 야구팬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제공= 조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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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한·미·일 언론에서 ‘오타니 현상’을 분석하는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그중 오타니 만다라트 계획표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타니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사키 히로시 감독의 권유로 만다라트 계획표를 짰다.


고교 선수 오타니의 꿈은 ‘8개 구단 드래프트 1순위’.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먼저 8가지 실천과제를 설정한다. 8가지 목표는 컨트롤, 구위, 스피드 160㎞/h, 변화구, 운(運), 인간성, 멘탈, 몸만들기.


그런 다음 그 8가지 실천과제를 이뤄내기 위해 다시 8가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의 야구팬들이 오타니의 만다라트 계획표에서 놀란 것은 ‘운’과 ‘인간성’을 목표로 정했다는 점이 아닐까. ‘운’과 ‘인간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다. 오타니가 ‘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쓰레기 줍기, 부실(部室) 청소, 심판을 대하는 태도, 책 읽기, 응원받는 사람, 긍정적 사고, 물건을 소중히 쓰자, 인사하기.


‘인간성’을 다시 세분하면 사랑받는 사람, 계획성, 감사, 지속력, 신뢰받는 사람, 예의, 배려, 감성.

오타니가 고등학교 야구선수 시절 작성한 만다라트 계획표(왼쪽 원본, 오른쪽 번역본)

오타니가 고등학교 야구선수 시절 작성한 만다라트 계획표(왼쪽 원본, 오른쪽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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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의 면모를 다시 보게 하는 일화들은 즐비하다. 고교 3년 동안 야구부 숙소 화장실을 청소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일화부터 MLB 진출 이후에도 그의 선행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이것으로 미뤄 만다라트 계획표가 오타니에게 내면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게으르다는 점이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항상 좋은 결과물을 내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까지는 이것이 통한다. 어떤 야구 선수가 프로 데뷔와 함께 스타플레이어로 조명받다가 몇 년 가지 않아 사라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재능은 잠깐 반짝할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진리다. MLB에서 스타플레이어로 각광을 받다가 약물, 폭력, 사생활 문제로 추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최근 메이저리그 베테랑 기자 제프 플레처의 저서 ‘오타니 쇼헤이의 위대한 시즌’이 번역되어 나왔다. 오타니와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해 쓴 책이다. 플레처 기자는 이 책에서 오타니가 등장한 이후 메이저리그 역사가 다시 쓰이고 있다고 말한다. 오타니는 이미 스타 플레이어 차원을 훌쩍 넘어섰다는 것이다.


오타니가 선발 투수로 나오는 날 에인절스 홈구장은 관중이 평균 5000~6000명이 더 들어온다. ‘오타니 현상’ 이후 미국 LA를 찾는 아시아 야구팬들이 부쩍 늘었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에인절스 야구장 기념품샵에서 17번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구입한다.

쇼군 투구를 쓰고 덕아웃에서 홈런 세리모니를 하는 오타니 쇼헤이.    [사진 제공= AP연합뉴스]

쇼군 투구를 쓰고 덕아웃에서 홈런 세리모니를 하는 오타니 쇼헤이. [사진 제공=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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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는 홈런을 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올 때마다 특별한 세리모니를 한다. 사무라이 시대의 쇼군 투구를 쓰고 동료들의 환영을 받는다. 오타니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무섭게 노력한다. ‘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따라온다고 그는 믿는다. 목표 달성에 방해되는 것은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야구에만 집중하고 몰입한다.


이것은 사무라이 정신의 핵심인 잇쇼켄메이(一所懸命) 정신과 통한다. 목숨을 바쳐 들이는 정성이 곧 잇쇼켄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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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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