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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당신의 위선에 오물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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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 외스틀룬드 감독 영화 '슬픔의 삼각형'
화이부실 인플루언서로 자본주의 허점 파고들어
초 단위로 비교되는 사회…심화하는 불평등
졸지에 뒤바뀐 계급 실랄하게 풍자
스마트폰 분실 뒤에야 타인 시선에 자유로워져

영화 '슬픔의 삼각형'에서 모델 야야(찰비 딘 크릭)는 시도 때도 없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린다. 진정성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포크에 감긴 파스타 면과 감탄하는 표정이 보기 좋게 어우러지면 그만이다. 맞은편에서 흥미롭게 지켜보던 손님이 "파스타는 안 먹을 거요?"라고 묻는다. 야야는 "네, 글루텐 불내증이라서요"라고 답한다. 남자친구 칼(해리스 딕킨슨)도 한마디 거든다. "사진용이에요. 인플루언서(Influencer)거든요." "그게 돈이 됩니까?" "상황에 따라 달라요. 솔직히 말하면 무료 협찬이 많죠. 이 크루즈도 협찬이에요." "미모로 표도 얻고 나쁘지 않네요. 괜찮은 장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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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와 팔로워 숫자는 오늘날 화폐나 다름없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의 관심이 타인의 구매 결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서다. 인플루언서에게 디지털 행동반경은 곧 인기의 척도. 남들보다 넓어야 더 많은 기업, 호텔, 식당 등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관심을 끌어내는 동력 대부분은 가상의 연출이다.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장하고 미화한다. 가상 세계를 넘어 일상에서도 자신을 최대한 잘 포장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극심한 경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헷갈리다 인간성까지 상실한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화이부실(華而不實) 야야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허점을 파고든다. 배경인 호화 요트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지위의 서열이 물리적으로 구분돼 있다. 예컨대 승무원들은 허드렛일하는 청소부들과 떨어져 생활한다. 비교적 자유롭게 선내를 활보하나 수영장 등은 이용할 수 없다. 부자 손님들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휴식을 훔쳐보며 더 높은 지위를 얻기를 고대한다. "저도 알아요. 서비스직 힘들죠. 어떤 고생을 겪을지 다 알아요. 하지만 그럴 때도 용기를 잃지 마세요. 힘을 내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일이 잘 끝나면 마지막 날에는 뭐가 들어온다?" "돈, 돈, 돈!"


사회적 지위는 움직이는 표적이다. 끊임없는 남과의 비교로 정해진다. 야야가 인생의 흥미로운 단면을 온라인으로 전하는 행위도 비교 대상이 된다.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에게서 질투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연출된 이미지 또는 동영상이라서 자신 또한 소외감에 빠질 수 있다.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저서 '내 안의 차별주의자'에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초 단위로 남들과 나를 비교할 수 있게 됐다"고 기술했다. "스마트폰으로 24시간 내내 가상 공간의 친구들과 그들의 성공을 지켜볼 수 있다. 그것이 현실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런 가상 자기 연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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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스틀룬드 감독은 이로써 심화하는 불평등의 원인을 다각도에서 살핀다. 그동안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개인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이다. 하층 계급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의욕을 북돋아 주는 장려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빈곤층은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유인책에 더 빠르게 반응한다. 하루하루가 위기라서 단기적인 해결책이 가장 잘 먹힌다. 전문가들의 생각처럼 유인책에 합리적으로 반응하기보다 근근이 버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스스로 일어서라는 훈계가 공허한 울림일 수밖에 없다.

둘째는 소득 불평등이나 빈곤의 대물림 같은 시스템적 요인을 바꾸자는 진보주의자들의 견해다. 개인의 결정이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한 주장이다. 환경 혹은 사회의 구조적 탓이라는 문제의식이 틀리진 않지만, 개인들이 일상적으로 내리는 구체적 결정에 시스템의 영향이 반영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추상적 설명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답보로 반복되는 악순환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유층에게 선순환을 일으킨다. 심리학자 키스 페인은 저서 '부러진 사다리'에 "미래의 더 큰 보상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성실한 투자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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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을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다수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성년을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건이 끝나자마자 스트레스 반응이 진정된다면, 본질적으로 안전한 세상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일 것이다. 운 좋게도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성공 가도를 달릴 가능성이 크며 앞날도 밝다. 현대 경제에서는 지금 당장 위기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기보다 장기적인 성공을 목표로 삼는 태도가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삼각형'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인물은 다름 아닌 야야다. 요트가 전복돼 무인도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가장 진취적으로 행동한다. 하향과 상향 비교가 모두 가능해 적임자로 낙점받았을 것이다. 하향 비교에는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는 위험이 따른다. 남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덜 열심히 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다. 반대로 상향 비교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이 성취하고픈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못 오를 나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야야는 인스타그램 조회 수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현실을 가리는 정신 상태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그는 사고로 스마트폰을 분실한 뒤에야 타인의 시선에 자유로워진다. 자기 삶을 찾아가려는 의지를 회복하고 생존 문제에 직접적으로 뛰어든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동기를 물으면 대부분은 사랑하는 이들과 관련한 개인적 가치나 대의를 떠올린다. 더 높은 지위를 원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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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현실에 좌절하더라도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을 삶의 중심에 두면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수백만 달러가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몇 분 동안 집중하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유인책에 항상 합리적으로 반응한다는 일반적인 경제 모델에서 좀 더 현실적이고 심리학적인 모델로 관점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페인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무의식적으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해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패턴을 끊을 수 있다"고 확언했다. "우리 인간들이 불평등 속에서 번영하기 위해서는 사다리를 개조하는 수밖에 없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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