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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사]루스벨트와 파나마운하 그리고 JP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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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26대 대통령 루스벨트
파나마운하 건설 절실해지자
한때 독점기업으로 제소했던
JP모건과 다시 파트너 관계로
20세기 초 파나마 운하 건설
美 기술력·생산력 전세계 입증
오늘날 역외 금융 중심지 우뚝

[세계금융사]루스벨트와 파나마운하 그리고 JP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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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1843~1901)가 1901년 암살된 후 당시 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가 42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한다. 미국 26대 대통령 루스벨트는 개혁적이며 제국주의적이었다. 그가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시 대기업과 금융가는 긴장했다. 존 피어폰트 모건(JP 모건·1837~1913)이 첫 번째 타격이 된다. 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JP 모건은 기업의 트러스트를 만들고 있었고, 루스벨트는 기업의 독점화에 반대했다. 루스벨트는 1901년 모건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석탄 및 철도 거대 기업 그룹인 노던 시큐러티(Northern Securities)를 기소했고, 1904년 연방대법원은 해체를 명령했다. 루스벨트는 연이어 43개 독점 기업을 제소했다.


그런 루스벨트도 파나마운하 때문에 JP모건이 필요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만드는 꿈은 적어도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산악과 열대 지역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실제로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800년대 내내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원했다. 프랑스가 운하 건설을 최초로 시도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자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1805~1894)가 이끄는 건설 팀은 1880년 해수면 운하를 건설하는 기공식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기념비적인 도전은 실패한다. 끊임없는 열대비는 계속 산사태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수천 명의 건설노동자들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죽어 나갔다. 드 레셉스는 해수면 운하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갑문 운하를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했지만 때를 놓쳤다. 에펠탑을 만든 귀스타브 에펠도 참여해 만든 운하건설 회사는 1889년에 파산한다. 당시 프랑스는 운하사업에 2억6000만달러 이상을 투자했고, 7000만 입방야드 이상의 흙을 굴착했다.


프랑스의 실패에서 예상되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를 개발하고 싶었다. 그는 한때 해군차관보였고, 역사에 미치는 해상력의 영향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바다에서 패권을 가지려면 상업뿐만 아니라 군사적 역량도 필수적이라 굳게 믿었다. 따라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미국이 통제하는 운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02년 운하 지역의 프랑스 자산을 4000만달러에 매입했다. 운하 건설을 위해서는 땅을 대여받아야 하는데 콜롬비아가 거절한다. 그러자 미국은 군사적으로 개입해 1903년 11월 독립된 파나마 공화국을 인정한다. 그리고 파나마와 조약을 체결해 운하 지역의 독점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보장받는다. 그 대가로 파나마는 1000만달러와 25만달러의 연금을 받았다.

운하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서 착수금이 당장 필요했다. 미국은 프랑스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4000만달러, 독립시킨 파나마의 영토를 사용하는 대가로 1000만달러가 필요했다. 국제적 돈거래를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국제 금융거래 네트워크 안에서 다양한 거래를 하던 JP 모건밖에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특별지급대리인으로 임명한다. 1904년에 JP 모건은 각 국가에 돈을 지불했고, 그 지불이 완결된 후 미국 재정부가 모건 앞으로 수표를 발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나마 운하는 1904년 5월 건설을 시작해 1914년 8월에 완성된다. 건설 중이었던 1906년 11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17일간의 파나마와 푸에르토리코 등 남미 순방을 시작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건설 현장에서 직접 중장비를 조종하는 사진을 찍어 운하에 대한 진심을 미국에 보여줬다.


20세기 초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미국의 제국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가진 기술력의 우위와 생산력의 규모를 전 세계에 보여줬다. 독보적인 공학적 성취인 동시에 남미를 미국의 영향권에 두는 제국 건설의 시작이었다. 파나마 운하로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ㆍ전략적 교차로에 제국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날 파나마는 역외 금융의 중심지이다. 파나마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자한 JP모건이 그 역사 뒤에 있다. 1927년 미국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파나마가 역외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세계가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파나마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월스트리트의 도움을 받아 특히 선적 등록과 관련해 미로 같은 면세 법인을 설립했다. 미국 은행들은 파나마를 금융 중심지이자 탈세 및 돈세탁의 안식처이자 선적 통로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JP 모건은 유럽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파산한 철도를 재편하고, 위기 상황에서 시장을 안정시키고,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기업 및 재무 구조의 기준을 만들었다. 루스벨트는 정치적 영리함과 포괄적인 비전을 결합해 제국주의를 향한 미국을 건설했다. 그 이후 30년 동안 루스벨트가 ‘세계 경찰력의 행사’라고 불렀던 이름으로, 미국은 카리브해 유역에서 30번 이상의 군사 개입을 감행한다. 루스벨트와 JP모건은 새로운 국가 파나마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 둘 사이는 비록 애증의 관계였지만 그래도 그 둘은 목표지향적 파트너였다.


1904년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였을 때 루스벨트는 중재인 역할을 했다. 1905년 뉴햄프셔에서 협상이 진행되었고, 루스벨트는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독일과 프랑스가 모로코를 놓고 거의 전쟁을 벌일 뻔했을 때, 루스벨트는 다시 개입해 협정을 중재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1906년 협상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10년 더 지연시켰다고 믿고 있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의 공식 포스터는 1년 전 개통된 파나마 운하를 영웅 헤라클레스를 빗대어 표현했다. 이 포스터가 말하려는 이 시대의 진짜 영웅은 미국이었다. 오랫동안 희망되고 추진된 적도 있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이 인류의 숙원 사업을 완성시킨 것이 바로 미국의 힘, 미국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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