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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날엔…]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대선판도 바꾼 '노무현 명연설'

최종수정 2020.08.08 09:00 기사입력 2020.08.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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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민주당 인천경선 연설, '장인 좌익' 의혹에 아내 변론…"대통령 후보 그만두겠다" 정치적 배수진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정치, 그날엔…]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대선판도 바꾼 '노무현 명연설'


“아내와 헤어지란 말이냐.” 김부겸 전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과 관련해 가족사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아내의 큰오빠를 둘러싼 비판이 고조되자 변론에 나선 것이다. 김부겸 전 의원 아내인 이유미씨는 자신의 큰오빠가 ‘반일 종족주의’ 저자인 이영훈 교수라는 것을 공개했다.

정치권 쪽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만 몰랐던 사실이 여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논란의 초점이 됐기 때문이다. 이유미씨는 큰오빠를 비롯해 가족들이 과거 학생운동을 했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현재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유미씨가 큰오빠가 이영훈 교수라는 것을 직접 공개한 것은 정치 리스크를 감수한 행동이다. 이번 공개로 그 사실을 몰랐던 이들까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김부겸 전 의원은 아내를 적극 변론하면서 “이것으로 시비를 건다면 연좌제이며 정말 옳지 못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당 대표 경선에서 불거진 악재를 숨기기보다는 정면 돌파하는 방식이다. 민주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이의 가족이 이영훈 교수라는 게 알려지면 여당 투표권자의 표심이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김부겸 전 의원과 아내의 적극적인 대처가 반전의 결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9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당 대표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9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당 대표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한국 정치사에서 가족과 관련한 사연, 특히 ‘정치 악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거꾸로 선거 판도를 바꿔놓은 결정적인 장면으로 전환된 사례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사 최고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2002년 4월6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의 ‘인천 경선’ 연설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노무현, 이인제, 정동영 등 후보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졌다. 대세론을 이끌다가 흔들렸던 이인제 후보는 인천 경선에 승부수를 띄웠다. 충남 등 충청권의 확실한 지지를 확보한 이인제 후보는 충청권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사는 인천 경선에서 선전한다면 수도권 표심까지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인제 후보는 당시 인천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장인(권양숙 여사의 부친)에 대한 좌익 활동을 거론했다. 색깔론을 자극해 민주당 내부의 중도 보수 표심을 흔들어놓으려는 정치적 계산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인제 후보의 승부수가 통했다면 민주당 경선 판도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노무현 후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소나기를 피하는 방법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방법이었다. 악재를 적당히 덮거나 해명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는 정치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는 어렵다.


노무현 후보는 정면으로 부딪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인천 경선 현장에서 장인의 좌익활동에 대한 얘기에 더해서 대통령 후보 자격에 대한 물음을 던진 것이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연설은 이런 내용을 담았다.


“제 장인은 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에 실명해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 알고 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계속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정치, 그날엔…]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대선판도 바꾼 '노무현 명연설'


노무현 후보는 역대 정치인 중에서도 대중 연설을 잘하기로 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아내의 가정사를 직접 거론하며 변론에 나서자 인천 경선 현장에 참여한 투표권자들은 동요했다.


노무현 후보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인천 경선 현장에서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일부 여성들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노무현 후보의 연설을 경청했다.


노무현 후보의 ‘좌익활동을 한 장인’을 거론하며 공격 포인트로 삼았던 이인제 후보는 청중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물을 한 잔 마셨고, 정동영 후보는 청중들의 호응에 맞춰 박수를 함께 쳤다.


노무현 후보의 인천 연설이 지금도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정치인의 말 한마디, 표현 하나가 유권자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후보의 이날 연설은 수십만표 이상의 효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결혼한 여성들은 아내를 지키고자 대통령 후보 자격도 포기할 수 있다는 정치적 배수진에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그날의 연설 하나로 사실상 끝이 났는지도 모른다. 이인제 후보는 반드시 이겼어야 할 지역(인천)에서 노무현 후보에 뒤졌고, 얼마 후 대선후보 경선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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