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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굽는 타자기] '육류' 작가와 '좀비' 선생…이보다 웃긴 철학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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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좀비의 목숨을 건 철학 수업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너는 물리나 수학을 '철학과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만 애당초 그런 학문은 모두 같은 것, 하나인 것이었단다. 처음에는 물리나 화학, 그리고 수학도 철학이었거든." 도쿄 시부야구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이렇게 얘기한 이는 '좀비 선생'이다. 살아 있는 시체를 이르는 바로 그 좀비, 실제로 가발에 숨겨진 그의 두개골은 함몰돼 있다.


아무리 죽여도 결코 죽음에 이르지 않아 3000년 동안 공부한 좀비가 천연덕스럽게 도시 한복판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상황. 그의 앞에 앉아 좀비의 철학 수업을 듣는 사람은 히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젠체하지만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모습일 수 있는 초라한 청춘이다. 그가 좀비에게 철학을 배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좀비'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일상의 철학자로 더디게 성장하는 과정을 사쿠라 츠요시의 책 '인간과 좀비의 목숨을 건 철학 수업'은 담고 있다.

사쿠라 츠요시는 스스로를 실패한 개그맨 지망생, 삼류도 되지 못한 '육류' 작가라고 소개한다. 한때 히키코모리였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다니던 대학을 돌연 중퇴하고 오랫동안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사회인으로 기반이 잡힐 무렵 모든 것을 버리고 인도로 떠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켜켜이 쌓인 삶에 대한 의문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철학적 접근이 이 책에 녹아 있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삶이 끝나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세상에는 나 혼자뿐이며 누군가 나의 인생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에서 철학은 출발하지만 선뜻 다가서기는 쉽지 않다. 철학은 어려운 데다가 당장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철학이 사실은 바로 우리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3000년을 산 좀비의 입을 통해 전한다. 멀게만 느껴지는 철학의 맥락을 문답식의 대화로 재치 있게 풀어낸다. 이 같은 형식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모습을 수록한 '대화편'의 구성을 오늘날 감각에 맞춰 변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살 명소인 절벽에서 히로를 만난 좀비 선생은 오랜 세월을 죽지 않고 견디며 축적한 사유와 그동안 인류의 앎의 지평을 넓혀온 철학자들의 지혜를 친근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례로 알기 쉽게 얘기해준다. 좀비 선생이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과 이를 통한 인식방식은 경험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칸트는 경험을 이성으로 인식함으로써 인식이 완성된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경험도 중요해요, 이성도 중요해요, 앙쪽을 합쳐서 인식이에요라고 인식 문제의 결론을 맺은 셈이라고 할 수 있지"라고 말하면 히로는 "경험이에요, 이성이에요, 둘이 합쳐서 인식이에요? 어째 동방신기 같지 않나요, 최강창민이에요, 유노윤호예요, 둘이 합쳐 동방신기예요"라고 맞받는다. 또 인생을 슈퍼마리오 게임에 빗대며 "적도 안 나오고 산도 계곡도 없는 스테이지가 이어진다면 그것을 즐길 수 있을까? 단지 똑바로 나아가는 것만으로 공주를 구할 수 있다면 너는 그게 즐거울까?"라고 좀비 선생이 묻기도 한다.

이 책은 철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철학의 주요 논점들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거나 철학자들의 계보도를 훑으며 철학의 맥락을 인물 중심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철학의 쓸모를 얘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철학의 실용성을 모색하는 시도는 일상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보고 경계한다. 대신 저자는 '철학의 일상성'을 꾸준히 얘기한다. 살면서 누구나 가졌을 질문에 대한 일상 속의 대화는 마지막에 "그럼에도 살아내야 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도달한다. 좀비 선생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예로 들며 "영원회귀를 하더라도, 이번 인생이 몇 번이나 되풀이돼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금의 삶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한다.


일상의 철학을 표방하면서도 철학의 전통적인 논제들을 아우르는 이 책은 철학은 관념적인 고담준론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올리는 간절한 질문에 어제와는 다른 답을 할 수 있는 지혜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좀비 선생과 히로의 대화를 듣다보면 굳이 목숨을 걸지 않더라도 철학은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인간과 좀비의 목숨을 건 철학 수업/사쿠라 츠요시 지음/추수밭/1만6000원)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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