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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광장의 봄, 비발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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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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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봄은 온다. 대동강 얼음이 녹는 우수를 지나,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으로 간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광장의 증오는 우리를 차갑게 얼어붙게 한다. 야구 방망이로 특검과 헌재를 위협하고, 아스팔트가 피로 물들 거라는 섬칫한 말이 대통령 변호인의 입에서 쏟아진다. 3·1절, 민족 자존의 상징이어야 할 태극기가 극우 집단의 광기 어린 시위용품으로 전락한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촛불 시민들은 대통령 탄핵 이후 좀 더 공정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전’을 부르짖는 분들과 공존을 도모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마지막 변론을 마치며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밝혔듯, “대한민국이 수호하고 발전시켜야 할 헌법적 가치”를 제시하여 “지금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 상태”를 조속히 안정시켜 주기를 바랄 뿐이다.
추운 겨울, 클래식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봄이 올 때까지 봄을 노래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기도 했는데, 드디어 비발디의 <봄>을 듣기 좋은 계절이 왔다. 시국에 대한 의견이 달라도 음악은 마음으로 함께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비발디는 <봄>의 악보에 직접 소네트를 써 넣어서 곡의 정취를 설명했다. “드디어 봄이 왔다! 새들은 매우 기뻐하며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나눈다.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숨결에 시냇물은 정답게 속삭이며 흐른다. 하늘은 갑자기 검은 망토로 뒤덮이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온다. 잠시 후 하늘은 다시 파랗게 개고 새들은 또다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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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봄>은 A(봄이 왔다)-B(새들이 노래한다)-A(봄이 왔으니)-C(산들바람과 시냇물이 흐른다)-A(봄이 오나 했더니)-D(폭풍우가 몰아친다)-A(그래도 봄이 왔다), 이런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주제(A)가 되풀이 등장하고, 사이사이에 새로운 에피소드(B, C, D)가 삽입되는 이 형식을 ‘리토르넬로(ritornello)’라고 한다. ‘리토르넬로’는 영어로 ‘리턴(return)’, 즉 ‘돌아온다’는 뜻으로, 갈등과 대립을 뚫고 제 자리로 돌아와야 인간 정신이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진화한 형식이다. 따라서 ‘리토르넬로’는 사자성어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에 담긴 음악의 지혜를 느끼면서 “그래, 천둥 번개가 잠시 몰아쳐도 봄은 결국 올 거야”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베네치아에서 활약한 비발디(1678~1741)는 별명이 ‘빨강 머리의 신부’로, 미사보다 음악에 미쳐 있었다고 한다. 그보다 7년 아래인 바흐(1685~1750)는 비발디의 협주곡을 무려 17편이나 편곡하며 작곡 연습을 했다고 하니,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면 비발디는 ‘음악의 큰아버지’쯤 될 것이다. 그는 500곡 가까운 협주곡을 비롯, 150곡의 종교음악과 90편의 오페라를 쓴 당대의 거장이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일년 내내 떠들썩한 축제(carnaval)가 벌어졌는데, 몰래 낳은 아이를 거리에 내버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피에타 자선원은 그 곳에 수용된 900여명의 소녀들 중 40명을 엄선하여 합주를 맡겼는데, 비발디는 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이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음악을 썼다. 이 불우한 소녀들 중에는 애꾸도 있고, 천연두로 망가진 얼굴도 있었지만 “천사처럼 노래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우아함과 정확성으로 박자를 맞추었다”고 한다. 비발디의 <봄>을 세계 최초로 연주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자선원의 소녀들이었다.

피에타의 소녀들에게는 음악을 연주하러 나가는 시간이야말로 햇살을 보는 해방의 시간이었고, 비발디의 음악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해 주는 축복 아니었을까. <봄>을 세상에서 제일 먼저 연주한 이 소녀들이 맛보았을 기쁨을 상상하며 지금 이 곳, 광장의 봄을 맞이하면 어떨까.

이채훈 클래식 비평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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