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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아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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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음식점에서 가끔 주문하는데 메뉴판에는 없다. ②누구나 한 번쯤 시켜봤을 테지만 먹어본 적은 없다.

①과 ②의 조합은 의외로 명쾌하다. 아 무 거 나, 4글자. 식당에 가서도, 술자리에서도 우리는 툭툭 내뱉는다. 아무거나 먹지, 아무거나 시켜. 그런데, 궁금하다. 우리는 정말 그 순간 아무거나 괜찮은 것일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말만 그렇다. 아무거나가 아무것도와 합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컨대 이렇다.
점심 뭐 먹지, 그냥 아무거나 먹자(부장). 자장면 드실래요?(차장). 며칠 전에 먹었잖아(부장). 그럼, 김치찌개는요?(대리). 옷에 국물 튀어(부장). 그렇다면, 돈가스는요?(막내). 너무 느끼해(부장). ……(차장ㆍ대리ㆍ막내).

결국 부장은 자기가 먹고 싶은 순댓국을 또 먹으러 간다. 마지못해 따라나서면서 차장, 대리, 막내는 차마 이 말을 꺼내지 못한다. '아무거나 먹자며? 결국 지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거면서'. 이때 아무거나는 '뭔지 모르겠지만 높은 분이 먹고 싶은 그 무엇'으로 해석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아무거나는 한층 더 심오하다. 남자의 제안에 여자가 아무거나라고 답한다면 십중팔구 이런 뜻이다. '내 입맛과 취향에 부합해야 하고, 내가 최근 일주일간 먹었던 메뉴와 겹쳐서는 안 되고,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에 방해되지 않아야 하고, 식당 분위기가 좋아서 품격 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음식'이다. 그러니 진짜 아무거나 사줬다가는 눈치코치 없는 생물이 되고 만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미국 동부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으니 서부에는 '책임의 남신상'을 세우자고 했다. 자유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유를 두려워하는데 이는 책임에 대한 무게감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 진단을 차용하면, 우리의 아무거나 증상은 선택의 피로감 탓이 크다. 직장에서의 선택, 사회에서의 선택, 가정에서의 선택. 그러다 보니 아무거나라면서 선택을 미루곤 하는데, 문제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중성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 회피다. 우야둔둥, 똑 부러진 선택이 최선이요, 선택하지 않은 결과를 수용하는 것은 차선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어쩔 수 없다. 저 부장과 여친을 위해 전국의 식당에서 ‘아무거나’ 메뉴를 만들 수밖에. 싸고 양 많은 것으로다가.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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