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과 ②의 조합은 의외로 명쾌하다. 아 무 거 나, 4글자. 식당에 가서도, 술자리에서도 우리는 툭툭 내뱉는다. 아무거나 먹지, 아무거나 시켜. 그런데, 궁금하다. 우리는 정말 그 순간 아무거나 괜찮은 것일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말만 그렇다. 아무거나가 아무것도와 합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컨대 이렇다.
결국 부장은 자기가 먹고 싶은 순댓국을 또 먹으러 간다. 마지못해 따라나서면서 차장, 대리, 막내는 차마 이 말을 꺼내지 못한다. '아무거나 먹자며? 결국 지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거면서'. 이때 아무거나는 '뭔지 모르겠지만 높은 분이 먹고 싶은 그 무엇'으로 해석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아무거나는 한층 더 심오하다. 남자의 제안에 여자가 아무거나라고 답한다면 십중팔구 이런 뜻이다. '내 입맛과 취향에 부합해야 하고, 내가 최근 일주일간 먹었던 메뉴와 겹쳐서는 안 되고,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에 방해되지 않아야 하고, 식당 분위기가 좋아서 품격 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음식'이다. 그러니 진짜 아무거나 사줬다가는 눈치코치 없는 생물이 되고 만다.
그 진단을 차용하면, 우리의 아무거나 증상은 선택의 피로감 탓이 크다. 직장에서의 선택, 사회에서의 선택, 가정에서의 선택. 그러다 보니 아무거나라면서 선택을 미루곤 하는데, 문제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중성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 회피다. 우야둔둥, 똑 부러진 선택이 최선이요, 선택하지 않은 결과를 수용하는 것은 차선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어쩔 수 없다. 저 부장과 여친을 위해 전국의 식당에서 ‘아무거나’ 메뉴를 만들 수밖에. 싸고 양 많은 것으로다가.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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