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의 이상과 가치는 고드윈이나 크로포트킨 등 아나키스트들의 고결한 삶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실은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에는 이미 아나키즘의 원리가 상당 부분 수용돼 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축인 권력의 분산과 견제 제도들에는 아나키즘의 원리가 일정 정도 구현돼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주인으로서의 개인을 가능케 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각성이다. 그것은 불교의 수행덕목인 6바라밀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되는 '지혜', 즉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탈(脫) 무명'은 부처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 아난다에게 말했듯 철저한 자기주체화로써 가능한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도 또한 내가 죽은 뒤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등명(燈明)으로 삼고 스스로를 의처(依處)로 삼을 것이지 남을 의처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약점이 드러난다.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는 '대의'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듯 국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의사결정을 남에게 위탁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을 대상화시키는 함정이 있다. 민'주'(民'主')가 민'객'(民'客')이 돼버리는 것이다.
이명재 기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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