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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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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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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가자 어둠 속에서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역시 이장 운학이었다. 그의 눈은 분노에 가득 차있었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돌아서서 하림이 가까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림이 열 발자국 쯤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서자 운학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나쁜 새끼!”
낮고 싸늘한 목소리였다. 분노를 억제하느라 그랬는지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지 모르지만 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오해요!’
하림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운학은 다시 몸을 획 돌려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림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잠시 우두커니 서있던 하림 역시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나쁜 새끼!’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리는 것 같았다. 짧지만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으로 이장 운학의 가슴 속에 들끓어대고 있었을 감정이 여과없이 하림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리곤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구부정한 등과 어깨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남경희를 바래다주러 갈 때처럼 바람은 여전히 소리 내어 불고 있었고, 저수지는 검은 빛을 반사하며 누워 있었다. 저수지에서 간간히 맹꽁이 우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무슨 말을 붙이고 달만한 여지도 없었다. 하림은 그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절룩거리며 걷는 운학의 걸음걸이 보조를 맞추려고 하림도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두 사람은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바람 부는 밤중의 둑길 위로 걸어가는 두 사람.
한 사람은 화가 잔뜩 난 채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사십대 중반의 늙수레한 사내였고 한 사람은 그 뒤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천천히 따라가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 하림 자기였다.
생각하면 우스웠다. 그가 화난 게 만일 남경희 그녀 때문이라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랑 그녀는 정말이지 오해를 받을 만한 사항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녀가 찾아와서 그야말로 하소연 겸 넋두리를 하다 간 것이었고, 자기는 그것을 들어준 것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오해란 게 꼭 이해를 거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해가 이해를 거쳐 삼해, 사해,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라면 그건 이미 오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오해는 그냥 오해일 뿐이었고, 그건 오해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이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이장 운학이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다면 그건 보통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 동네의 이장이었다. 그의 협조와 호의가 없다면 이곳에서 지내기가 보통 불편한 노릇이 아닐 게 틀림없었다.

오해를 풀려면 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화가 잔뜩 난 채 걸어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무슨 말부터 꺼내어야할 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괜히 잘못 말을 꺼내었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처럼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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