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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다산과 정조와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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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사회문화부장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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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500여년간의 역사를 끝낸 것은 1910년 이른바 경술국치라고 불리는 한일 강제 병합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생명체의 사실상의 소멸, 아니 최소한 그 사멸의 시작은 1800년 6월부터였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1800년 6월의 보름간 두 인물에게 일어난 불행과 좌절이야말로 그 두 사람의 불운을 넘어서 조선의 불행, 민족의 불운이었으며 조선의 죽음의 시작이었다. 바로 정조의 죽음,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좌절이었다.

1800년 6월, 천주교에 연루되고 집권층인 노론 세력의 견제로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남양주 마재에 내려와 있던 정약용은 평생 은거하며 학자로서의 삶을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6월12일 정조가 한서(漢書)를 10질 보내온다. 그 책들 속에는 사마천의 '사기'도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정조는 '사기'를 통해 다산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일 것임을, 그럼으로써 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조와 다산, 두 사람의 인연을 '풍운의 만남(風雲之會)'이라고 했듯 다산은 달밤 아래서 15년간 일심으로 움직였던 철인군주 정조와 함께 조선의 부흥을 위해 가시밭길 같은 정치의 현실에 다시 뛰어들 각오를 다진다.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에게 가혹했다. 정조는 다산에게 책을 내려보낸 그 다음 날부터 몸에 종기가 나면서 앓아눕더니 허망하게도 보름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불과 48세였다. 다산은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한양으로 달려가 정조의 시신이 누워 있는 창덕궁 앞에서 통곡한다. 오열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저 멀리서 아마도 희미하게 조선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다산의 정치적 생명은 끝나고 말았다. 18년간의 유배를 통해 방대한 저서를 남겼고 그래서 학자로서의 황금기를 일굼으로써 다산은 학문의 성취를, 조선은 뛰어난 학자를 얻었지만, 다산은 현실을 잃었고, 조선은 갱생과 부흥의 생명력을 잃었다.

귀양에서 돌아와 두물머리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쓸쓸히 여생을 마친 다산. 그는 사후에 더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 오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산에 대한 찬미와 헌사는 그를 저 높은 곳으로 올려놓고 있다. 마침 다산 탄생 250주년이었던 작년은 특히 어느 해보다 다산에 대한 기념과 조명이 쏟아졌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숱한 일들이 그렇지만, 다산에 대한 기념과 찬사에서 나는 풍요 속의 빈곤을 본다. 그건 마치 지금의 교회가 예수 없는 교회이며 불교가 부처 없는 불교이듯이 대학의 수많은 다산 기념관들을 볼 때마다 나는 다산 없는 다산 기념관의 공허함을 보게 된다. 그런 공허함의 한편에는 특히 공직자들의 넘쳐나는 다산에 대한 찬사와 흠모의 변들이 있다. 과거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을 듯한 어느 대통령이 '목민심서'를 애독한다고 해서 실소를 자아낸 바도 있었지만 오늘날 공직자들에게 '목민심서'는 일종의 성경과도 같은 지위에 올라 있다. 아마도 곧 임명될 총리나 장관들, 고위공직자들 중에도 적잖은 이들이 목민심서를 애독한다고 할 것이며 또 다산을 얘기할 것이다.
다산을 닮겠다는 뜻, 그건 가상하다. 다만 다산을 얘기하고 목민심서를 말하기 전에 다산의 저작들의 제목에 담긴 다산의 울분과 좌절을 먼저 생각해보기 바란다. 왜 '목민의 서'가 아닌 목민의 '심서(心書)'인지를, 왜 경세의 방도를 당대가 아닌 후세에 남긴다고 해야 했는지를(經世遺表), 왜 형벌을 집행함에 있어 삼가고 삼가는(欽欽) 마음이어야 한다고 했는지(欽欽新書)부터 되새겨보기 바란다. 그 좌절과 비통과 울분, 철저한 경민(敬民)의 마음을 자신이 갖췄는지부터 부디 살펴보기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국회 청문회 이전에 스스로 거쳐야 할 인사 청문회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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