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드 켈리(1853~1880)는 산적이었지만, 호주인들에게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각인되고 있다. 아직도 네드 켈리를 기르는 다양한 영화와 책, 음반이 나오는 걸 보면, 그에 대한 호주인들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부의 불균형 또한 극심했던 때였다. 불균형 해소를 위해 식민 정부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땅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소수 권력자들이 앗아가면서 불균형은 더욱 심해져갔다. 경찰들이 내세웠던 '대민 정책'마저도 돈 많은 극소수 부자들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같은 분노를 대변해줬던 인물이 네드 켈리였다.
네드 켈리는 살인자였으며, 은행털이범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3명의 경찰관을 살해했고, 은행까지 털었으니까…. 하지만 이 과정에서 네드 켈리는 은행에 빚진 가난한 농부들의 담보 채권을 태워버리는 등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지배 세력인 영국의 공권력에 맞서 싸웠다.
'의적' 네드 켈리는 억눌려 살아왔던 서민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준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공권력 집행방법과 토지배분을 둘러싼 잡음들은 훗날 호주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호주 식민정부의 정책에 큰 틀이 바뀌게 된 것도 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네드 켈리가 없었더라도 사회는 분명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회가 빠르게 진일보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네드 켈리의 유품은 멜버른 시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생전에 썼던 투구며 갑옷을 식민정부가 있던 멜버른 시내 한복판에서 볼 수 있다니 그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의 '수제 갑옷'은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에, '데스마스크'는 구 멜버른 교도소에 전시돼 있다. 두 장소간의 거리 또한 도보로 15분 정도 밖에 안 돼 외국인들의 '짧은 관광코스'로도 많이 애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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